세상의 모든 배움에는 슬럼프와 매너리즘의 기간이 있다. 사진이라는 부문도 예외가 아니다. 실력이 미천한 나도 그런 경험을 몇 번이고 했다. 특히, 이제는 어느정도 요령을 알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올라올 때마다 슬럼프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런때는 주변을 둘러보아도 찍을만한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찍을 소재가 없기 때문이라는 자기변명이 올라온다. 그리고 이는 유명한 출사지를 찾아가지 않아서 그렇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기간에는 출사지를 찾아간다고 해서 딱히 뭔가 나아지지 않는다. 집에 와서 메모리카드 데이터를 외장하드로 옮긴 후 한 장 한 장 넘겨볼 때 느끼는 그 허무함은 당사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정말 건질 사진이 없다. 사진이 재미가 없어지고 하루종일 내가 왜 다리 아파가며 돌아다녀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근 20년간 사진이라는 취미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했다. 내 사진생활을 돌아보았을 때 정말 잘했다 생각했던 것은 일상에서 카메라를 습관처럼 들고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사진이 좋기도 했지만 '어쩌다 걸리는' 작품 하나를 항상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20대 후반은 늘 무거운 짐들과 함께 했다. 출근을 하든, 친구를 만나든, 교회를 가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아랑곳않고 셔터를 눌렀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크럼플러 밀리언달러 숄더백은 20년 가까이 쓰고 있는 나의 애장품이다.
나의 주요 생활동선은 ① 집에서 전철역까지 이동하는 시끌벅적한 상가 길 ② 주말 버스 정류장부터 교회까지 가는 길 ③ 부모님 댁 마당 ④ 아파트 인근 공원이었다. 공통된 특징은 나에게 몹시 익숙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 길이 그 길'이었다. 만약 당시에 인스타그램 같은 것이 있었다면 '매일 카메라 들고 돌아다니는 수상한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내 모습이 피드에 올라왔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새 렌즈를 택배로 받은 기쁨을 참을 수 없어, 늦은 저녁 인근 초등학교에서 촬영을 하다가 야간 순찰을 돌던 학부모님들로부터 신분을 밝히라는 추궁을 받기도 했다)
2007, 서울
2007, 수원
2007, 서울
멈춰있을 때도 좌우상하를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비가 오는 버스정류장에서도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대게 되었고, 공원 벤치에 앉아있다가도 마시던 커피를 울타리에 올려놓고 셔터를 누르게 되었다. 쇼윈도우로 보이는 카페의 정경은 단골 촬영 아이템이었다. 이렇게 장비를 들고 다니며 나는 늘 최상의 것을 기대했다. 허황된 기대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늘지않는 나의 실력에도 불구하고 항상 '꺼리'를 찾아다녔다.
2008, 서울
2011, 덕수궁
혹여 카메라를 챙기지 못했을 경우, 담을만한 것이 발견되면 집으로 돌아가 장비를 챙겨나오기도 했다. 그럴 상황마저 안되었을 경우에는 기억해두었다가 다음날 동일한 시간대에 와서 기어코 사진을 남겼다.
2015, 용인
2013, 서울
나는 유명한 출사지에 많이 나가야만 실력이 는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내 사진 역량은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일상을 통해 조금씩 나아졌다고 믿는다. 이 경험들로 인해 조금이나마 얻었던 것은 '시선'이었다. 늘 보던 풍경들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은 평범해보이는 곳에서도 소재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중에 사진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서 알게된 것이지만 사진 촬영에서 중요한 것은 'How to Look'이었다.사람들이 똑같이 물리적인 눈으로 보는 대상들을 우리가 어떤 프레임으로 담아내느냐에 따라 그것으로부터 전혀 다른 느낌과 메시지를 추출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가 길들여진 익숙함을 깨고 다르게 보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사진 전문가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연습을 권한다. 책상 위에 계란 하나를 올려놓고 필름 한 통을 다 써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반대의 사례도 소개해보겠다. 결혼 전, 쓰던 베개를 바꿔야 할 일이 생겨 이불집을 찾아야 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갈 계획을 세웠던 나는 인터넷에서 위치를 검색해보고 놀라고 말았다. 대형 이불매장이 바로 우리집 코앞에 떡하니 있었던 것이다. 나는 5년을 넘게 그곳을 걸어다녔지만,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채지 못했다. '관심도'가 이렇게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7, 용인
2011, 경북
2021, 용인
일상에서의 이런 연습들은 사진에 대한 의욕이 저하될 때도 이 취미를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어떤 분야든 실력은 우리가 기대하는 우상향 직선으로 늘지 않는다. 한동안은 아무리 시간을 투자해도 실력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떨어진 것 같다. 그러나 충분한 노력이 쌓이면 어느순간 내가 한단계 올라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평소에 자신이 투자하는 노력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그런 열정도 바닥났고, 여건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나갈때마다 어느 정도의 감각이 내 손에서 작동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연습들이 귀중한 자산이 되었음을 느낀다. 물론 누구에게 자랑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지만, 덕분에 나이가 들어도 사진이라는 취미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사진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만약 당신이 사진에 관심이 있다면, 연습 대상은 (아니 작품 대상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이 머리를 감싸쥐며 고민하고 누른 셔터의 수만큼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