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찍어놓은 사진들을 넘겨보며 가끔은 내 표정이 찡그러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된다. '조금만 더 구도를 틀어서 찍을 걸', '조리개를 조금만 조을 걸' 뒤늦은 후회는 소용이 없지만 부족한 사진은 부족한대로, 괜찮은 사진은 괜찮은대로 아쉬움이 남는다. 이래서 내가 초보 아마추어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씁쓸함도 삼키게 된다.
하지만 어떤 파일들은 한장씩 넘길수록 내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음을 느낀다. 다름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이 담겨 있는 사진들이다. 그것들 역시 촬영이라는 관점에서는 부족함이 한가득이지만 신경쓰지도, 개의치도 않는다. 볼때마다 그저 좋다. 남겨진 것은 정지된 컷이지만 당시의 웃음소리와 즐거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하다. 사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음이 안타까울 정도이다.
2008년, 내가 운영자로 있던 사진 동호회에서 야심차게 봄 출사를 기획했다. 말이 동호회이지, 사실 캠퍼스 생활을 함께했던 선후배들 중 사진 촬영이나 감상에 관심있는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동안은 기껏해야 서울 경기권을 택하여 한 달에 한 번 꼴로 모였지만, 동호회 2주년을기념하여 이번에는 멀리 떠나보기로 했다. 장소는 통영의 소매물도였다. 서울에서 밤 버스로 출발하여 새벽 도착 후 소매물도와 미륵산을 둘러보고 찜질방에서 1박 , 창원으로 벚꽃 출사를 가는 일정이었다. 벚꽃놀이 인파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목요일 밤 출발하여 토요일에 올라오는 스케줄로 의견을 모았다.
휴가도 하루 써야하는 출사였기에 최악의 경우에는 나 혼자만 가게 될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4명의 멤버가 꾸려졌다. 동호회를 운영하며 일반적으로 당일 출사 참여 인원은 신청 인원보다 항상 적었기에 우려가 되었다. 그러나 이번은 개인 스케줄을 미리 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정이라 그런지 다들 확실히 시간을 비워두었다. 목요일 밤 4명 모두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날 수 있었다.
소매물도 출사는 내 사진생활 중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봄 기운이 무르익은 남도와 완벽한날씨, 평일의 여유는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2008, 통영
2008, 소매물도
통영에서 첫 배를 타고 2시간 정도를 가서 소매물도에 도착했다. 등대섬이 보이는 전망대는 등산로 비슷한 트래킹 코스라 살짝 숨이 찼지만, 환상적인 풍경에 그런 것들은 바로 잊혀졌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다운 절경이 이곳이 아닐까, (적젆은 반론이 예상되지만) 당시 기분으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2008, 소매물도
이 작은 섬에서 3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우리 네 사람은 어린아이처럼 뛰어 놀았다. 당연히 사진도 많이 찍었다. 트인 마음가짐으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풀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했다. 섬 길을 걸으며 그간 묵혀둔 각자의 이야기도 나누었다. 미리 사둔 충무김밥을 먹으며 은은한 하늘빛 바다와 등대섬을 바라보는 시간은 일상에서 결코 누릴 수 없는 낭만이었다.
2008, 소매물도
2008, 소매물도
이른 오후 다시 통영으로 돌아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미륵산으로 향했다. 미륵산은 그리 높지 않기에 조금만 열심을 내면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요즘은 케이블카가 생겼다던데, 당시에는 걸어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중간에 미륵사도 들러 절 구경도 하고 한려수도가 보이는 정상에서 마음껏 경관을 즐겼다.
2008, 미륵산
저녁 즈음에는 뒤늦은 피로가 몰려와 모두 찜질방에서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돌아보니 무박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내려와 왕복 4시간 배로 소매물도를 둘러본 후, 458m의 미륵산까지 올라간 것이었다. 뻗어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이튿날은 창원으로 이동했다. 창원은 내 절친이 있는 곳이었다. 원래는 진해 군항제를 찾으려 했지만 그 친구는 내게 창원으로 오기를 권했다. 기왕 내려오는데 만나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창원에도 예쁜 벚꽃길이 충분히 많다고 유혹(?)을 했다. 생각해보니 인산인해의 진해를 가는 것이 머리가 좀 아프긴 했다.
친구의 말대로 창원의 벚꽃도 참 아름다웠다. 전날의 피로가 남아있긴 했지만 돌아가는 버스를 곧 타야 하므로 마지막 열정을 불살라 놀았다. 어디서 찍든 작품사진이 되는 장소였다.
2008, 창원
창원시청 앞 근린공원에 앉아 치킨을 뜯는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돌아왔다. 1박 3일의 일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순식간에 지나간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3개월동안 다른 세상에 살다 온 것 같기도 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한동안은 소매물도 사진들만 동호회 사이트에 올라왔다. 나만 해도 이틀동안 메모리카드 2개를 꽉꽉 채웠으니 얼마나 원없이 사진을 찍었는지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 사진 원본들이 랜섬웨어로 싹 다 날아갔다. 지금 갖고 있는 사진들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올려두었다 가 백업해둔, 몇 장 안되는 추억이다. 소매물도의 풍경들을 담은 사진들도 많았지만, 미니홈피에는 함께 갔던 사람들의 단체 사진만 올렸다. 그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에게는 이 사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다른 사진들은 다 잃어버려도 괜찮다.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 순간이 담긴 사진을 보며 나는 지금 활짝 미소를 짓는다.
카메라를 처음 구입한지 20년이 가까워지고 있고, 첫 6-7년은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멋진 풍경이나 정물을 담을 수 있었던 때가 아니라, 친구, 선후배들과 함께 하하호호 웃으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던 시간들이다. 사진이라는 것을 매개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기에 그 시간들도 아름다울 수 있었다. 소매물도는 내일이라도 다녀올 수 있지만, 15년 전의 그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다시 찾을 수는 없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가정을 이루며 아버지 어머니로서 바쁘게 살고 있다. 이 중에는 이제 연락이 닿지 않는 이도 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2008년 소매물도의 추억은 함께 갔던 사람들 각자의 기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내게 소매물도의 추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면에 다 담을 수 없지만 또다른 이들과 함께했던 강릉 양떼목장-정동진 출사, 창녕 우포늪 출사 등도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사진에 담겨진 활짝 웃는 친구, 눈이 감긴 후배, 설정 포즈를 소화해내는 동료들의 사진을 보노라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든다. 그러나 가장 뚜렷하게 올라오는 생각은 이것이다.
'참 다행이다. 그때 그렇게 함께할 수 있어서.'
수많은 사진들을 찍었지만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다. 이런 기억들을 가진 내가 새삼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감사하게 된다.
사진은 기록의 도구이고 어떤 것을 기록하느냐에 대한 가치는 촬영자마다 다를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나의 가족, 친구, 동료들이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이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