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익숙한 Rule들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질수도 있다
오늘은 좋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 직접적인 보고서 작성 스킬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 부분을 간과하면 아무리 유명한 시중의 보고서 작성법 책을 읽고 그에 따라 보고서를 작성하더라도 낙제점을 맞을 수 있습니다.
상사를 연구하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과 함께 독배를 마셨습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라"는 유명한 말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는 (특별히 보고서 작성에 있어서는) "독자가 원하는 바"에 절대 복종해야 합니다. 독자는 누구일까요? 당연히 내 보고를 받는 상사입니다.
누군가가 글빨(?)이 좀 있다고 내 마음대로 글을 쓰고 취향을 존중해 달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작가이지 회사원은 아닙니다. 회사에서는 수 많은 상사가 있고 보고서를 제출할 때는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선호하는 스타일의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상사의 스타일에 따라 때로 우리는 기존의 원리나 책에서 이야기하는 가이드를 과감히 깨야 하는 순간도 생깁니다. 보고서의 독자는 '보고서 작성하는 법' 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같은 눈으로 내 보고서를 기다리는 상사이니까요.
사실 지난 글들에서 저는 '정답은 없습니다'라는 말을 계속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워낙 다양한 상사가 있고 원하는 바와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고서 작성법만큼 원론과 각론의 gap이 큰 주제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사를 "연구해야" 합니다. 나와 가까운 상사라면 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껏 보고해본 적이 없는 상사에게 보고할 경우가 생긴다면 집중적으로 강도높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아래 몇 가지 지침들을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1. '나의 상사'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아래 질문이 전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상사의 선호와 취향에 관해 가능한 빨리 감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 에스프레소처럼 농축된 보고서를 좋아하는가?
□ 아니면 충분한 설명을 남기는 보고서를 좋아하는가?
□ 무리하게라도 정량적 수치를 넣는 것을 좋아하는가?
□ 아니면 불필요한 부분은 정성적 문장으로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 좋아하는 용어는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용어를 싫어하는가?
□ 보고서 본문에 표를 삽입하는 것을 즐겨하는가?
□ 아니면 표는 별첨으로 빼고 본문에는 오로지 텍스트만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가?
□ 구호성 표현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가?
□ 아니면 혐오하는가?
□ 근거 데이터는 별도 엑셀파일로 개체삽입해도 상관없는가?
□ 아니면 반드시 별도 표로 정리하여 워드/한글 문서 내에 재작성하는 것을 원하는가?
□ 배경과 개요를 충분히 기술하는 보고서를 좋아하는가?
□ 아니면 서론은 최소화하고 신속하게 본론으로 들어가는 보고서를 좋아하는가?
□ 내 상사는 자그만 실수에 민감한가?
□ 혹은 흐름만 이해되면 작은 오류는 신경쓰지 않는 타입인가?
... 그 외 수 많은 사항들이 있을 것입니다.
2. 내 상사에게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하고 공부하라
기존 보고서들은 상사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귀한 자산입니다. 가능하면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보고서의 흐름을 분석해 보고, 자주 쓰는 용어와 표현 방식 및 스타일을 익혀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 선배 중 한 명은 새로운 부장님이 오시자, 그분이 이전에 근무했던 부서에 비공식적으로 연락해서 보고자료들을 받아놓고 일주일간을 밤늦게까지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실제로 보고서를 쓸 때도 항상 그 자료들을 레퍼런스로 띄워놓은 채 작업을 했습니다.
3. 상사의 피드백은 메모하고 셀프 리뷰하라 (=부딪쳐라)
피드백이 다른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경우 혼나고 깨지는 것이죠. 다만 깨질 때 그냥 깨지지 말고 반드시 무언가를 얻고 돌아와야 합니다. 피드백 받는 순간은 상사의 성향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예를 들어,
"눈 어지럽게 왜이렇게 표가 많아? 별첨으로 따로 정리를 해봐."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들었다면 앞으로는 가급적 본문 내 표는 삽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말이 어느정도 통하는(?) 분이라면 이렇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부장님, 앞으로도 특별한 일 없으면 표는 별첨으로 정리하고 본문에 요약 결과만 작성할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이 역시 명쾌한 답변을 못 들을 수도 있습니다. 친절한 상사라면 잘 이야기 해 주겠지만, 럭비공 같은 유형이라면....;; )
물론 이렇게 물어보는 목적은 '예전에 당신이 이렇게 말했지 않느냐'는 변명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사의 스타일에 나 자신을 적응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피드백 받은 내용은 반드시 오답노트로 삼아 메모하고 다음 번에 동일한 실수를 겪지 않아야 합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좀 격하게 깨진다 해서 기세에 눌려 입 꾹 닫고 나오면 앞으로도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번의 실패에 반드시 한 개 이상 얻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면 점점 상사의 스타일에 적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론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니다. 내가 상사에게 맞춰야 하지, 상사가 나에게 맞출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혀를 내두르는 요구를 한다 해도 뒷담화만 하는 것 보다, 하루라도 빨리 그 스타일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고난(?)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서는 나를 위해 있지 않고 보고받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할 때는 항상 그 보고를 받는 사람을 의식해야 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어느 회사든 (아무리 다른 부서라도) 보고서 작성에 대한 개략적인 공감대는 있습니다만, 상사의 성향에 따라 필요하다면 그 틀마저도 깨어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