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로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유대인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특히 율법과 종교에 심취한 이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예수는, 자신들이 바라던 메시야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떤 메시야상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실제 예수의 행위와 말씀은 그들과 얼마나 달랐을까요?
초라한 메시야 예수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이고, 성부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을 때 그가 한 대답이 이를 보여줍니다.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5:2, 개역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공생애 사역동안 그가 다윗의 후손이며 유대인의 참된 왕임을 드러내는데 극도로 인색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들조차 -예수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미래의 서열매김으로 다투었으며, 그가 부활하셨을 때에도 국가의 회복을 기대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사도행전 1:6, 개역개정)
메시야에 관한 고정관념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는 자신을 쉽사리 왕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풀었을 때도 군중들이 자기를 정치적 왕으로 삼을 줄 알고 제자들과 함께 신속히 자리를 피했습니다. 복음서 말씀을 깊이 읽어보면 예수가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굳어버린 관념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의 나라는 군사적 정복이 아닌 겸손과 순종, 희생과 평화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36)
정치적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메시야를 유대인들이 기뻐할 리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의 기적을 좇다가 그의 말씀을 듣고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요한복음 6:66). 무엇보다 구름을 타고 오실 메시야를 고대하던 묵시주의자들은 나귀를 탄 초라한 예수의 모습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들의 눈에 예수는 메시야로서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자였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 작자미상
율법 파괴자 예수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 두 번째는, 바로 율법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포로기와 회복기, 그리고 신구약 중간기를 공부하며 우리는 국가와 성전을 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 율법을 선택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절대적인 순종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룰 거룩한 백성을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 불리는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필요에 따라 안식일의 규례를 어기기도 하였고 부정한 자들과 먹고 마시기도 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에게 오히려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으며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는 소동을 피웠습니다.
사실 예수는 누구보다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율법의 창시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율법에 얽매인 존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가 말한 '의'란, 율법의 조항들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단순히 그 강령들을 지키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근본 의도를 깨달아 순종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폐하는 율법 조항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그 정신과 반하여 만들어진 조항들을 기꺼이 거슬렀던 것이지요. 그러나 위선과 아집으로 굳어져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의 눈에 예수는 율법 파괴자로 보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모세가 율법에서 이르기를..."이라고 주장할 때, 예수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했습니다.
... (모세의 율법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태복음 5:38-39, 개역개정)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 구스타브 도레
신성 모독자 예수
사실 위의 두 가지가, 유대인이 예수를 배척하게 된 결정적인 사유는 아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음에까지 넘겨준 이유는 바로 그가 신성 모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스스로를 신적 존재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랍비나 예언자 같은 인간의 한계 속에 머무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여러 차례 암시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8:23, 개역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8:58, 개역개정)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누가복음 20:44, 쉬운성경)
예수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수 없이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아버지'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른 것과는 명백하게 달랐습니다. 그는 신적 존재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요한복음 8:19, 개역개정)
신약성서와 교회가 증언하는 신앙의 근본 기초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부활의 이적으로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로마서 1:3-4). 그는 자기를 비워 인간의 형체를 취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빌립보서 2:6-8). 아니, 그는 태초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십니다(요한복음 1:1).
그러나 유대교는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신적인 왕이 존재한다? 그것은 이방 세계에나 있을 수 있는 이론이었습니다. (저자는 유대교가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말하는데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그런 증거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스스로를 에피파네스(신의 현현)으로 칭했던 안티오쿠스 4세를 향해 유대인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지요?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9:7, 개역개정)
「산헤드린에서 심문받는 예수」, William Hole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군사적, 정치적 정복이 아닌 백성들을 위해 고난받는 종(이사야40~66장)의 예언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5장에서 고난의 종이 민족적 소명임과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의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이사야의 '고난의 종'은 어떤 한 개인의 형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저자는 "예수는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이 이유만으로 배척을 받았다. 진실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고린도전서 1:23) 이었다."고 서술합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마태복음 26:63-66, 개역개정)
이러한 유대인들의 배척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들과 온 인류를 위한 메시야였습니다. 신성모독을 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메시야를 죽인 그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의 행위가 이사야의 예언을 오히려 성취시키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에 해박하다고 자신했던 그들은 실상 성경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예수는 이해하기 힘든 모습으로 오셨을까?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실패한 메시야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런 의문이 솟아오릅니다.
'그분은 백성들이 좀 더 이해하기 쉬운 메시야의 모습으로 오셔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주류였던 자들은 그를 배척했지만, 소외받고 외면받던 이들, 그리고 성경을 진정으로 깨달았던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왕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시므온이 아이를 팔에 안고 하나님께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주님의 종을 주님의 말씀대로 평화롭게 떠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 눈으로 주님의 구원하심을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구원을 모든 백성들 앞에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는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누가복음 2:28-32, 쉬운성경)
그 여자는 물 항아리를 버려 두고, 마을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리 와서 내 과거의 일을 다 말해 준 사람을 한번 보세요. 이분이 메시아가 아닐까요?" (요한복음 4:28-29, 쉬운성경)
예수님 바로 앞에 서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 15:39, 쉬운성경)
하나님은 메시야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같은 모습으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무지하고 천대받던 사람들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율법과 선지서에 박식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이 만든 것들이 메시야를 알아보는데 장애가 되고 말았습니다. 실상 그들이 성경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지독하게도 무지했던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는데,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5:39, 쉬운성경)
고난의 종 메시야 예수를 증언하는 성경들
무엇보다 구약의 성경들도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합니다. 우리는 5장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종의 노래'를 통해 고난의 종을 예언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예언의 의도는 당시 포로기와 회복기를 거치던 이스라엘의 사명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민족이 아닌) 개인으로 오실 메시야가 누구시며 어떤 일을 행하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종의 노래들이 어떤 점에서 예수를 증거하고 있는지 확인해 봅시다.
볼품없는 모습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개역개정)
앞서 말씀드렸듯 예수는 메시야로서 위엄이나 화려함은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복음을 선포했을 때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마태복음 13:55)며 의아해했고, 메시야를 고대하던 나다나엘조차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복음 1:46)며 냉소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메시야가 겸손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예언한 성경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과 소년 예수
세상의 빛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사야 42:6-7, 개역개정)
예수는 백성들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고 선포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온 것은 어둠속에서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의 눈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다."(마태복음 15:14)고 말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암흑과 같은 삶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공생애 사역 가운데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눈,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 무엇이 바른 길인지 보지 못하는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박식한 랍비였지만 예수에게 진리를 들은 후 그가 오히려 어둠 속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했던 삭개오는 예수를 만난 후 그가 어둠 가운데서 행하던 모든 일들로부터 떠나기를 결단했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 12:46)
겸손한 삶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이사야 42:2, 개역개정)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는 결코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예수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도록 시험했지만(마태복음 4장)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지도, 충동질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이 메시야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까봐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이것이 성경이 예언한 고난의 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겸손과 낮아짐을 가르쳤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0:27)
포기하지 않는 자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사야 42:3, 개역개정)
예수가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일반적인 백성들의 시선과 달랐습니다. 예수는 모두가 포기한 구제불능같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소망이 있음을 일깨워주고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는 소경, 나환자, 절름발이를 고쳐주었고 사람들이 경멸하는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려 식사하고 대화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은혜받을만한 자격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버려진 죄인들은 예수를 만난 후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자비는 특별히 사마리아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우리는 지난 장들을 통해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들인지 배웠습니다. 다윗의 왕국을 배반한 이들, 죄악의 결과로 멸망당해 타 민족과 혼혈이 되어버린 잡종, 포로기 이후에도 유대인들을 방해하고 괴롭혔던 배신자들... 예레미야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들이 유다의 회복과 함께 사마리아도 회복될 것임을 예언했지만 이는 현실과 무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가 사마리아를 찾고 사마리아인들을 만남으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는 은혜를 바라지도 않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 영혼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예수는 진정한 이웃에 대한 비유에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셨습니다. 예수께 고침받은 나병환자 열 명 중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돌아와 그에게 경배한 사건은 하나님의 자비가 사마리아에까지 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를 고치시는 예수
순종의 삶
...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사야 50:4-5, 개역개정)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고난의 종이 짊어져야 할 사명에 흔들림없이 나아갔습니다. 그의 죽음이 다가왔을 때, 신적인 능력을 사용하고자 하는 충동을 이기기 위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한 사건은 유명합니다(마가복음 14:36). 예수는 그가 죽지 않도록 강하게 권유한 제자를 향해 오히려 대적하며 꾸짖었습니다.
묵묵히 감당한 죽음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으므로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줄 아노라 (이사야 50:6-7, 개역개정)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개역개정)
실제로 예수는 죽음에 넘겨져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가 신성모독으로 유죄판결을 받자, 사람들이 그를 때리고 침뱉고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묵묵히 모든 것을 당하며 사형장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사야가 표현한 것처럼 그 모습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았습니다. 모든 대적을 정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리라 기대했던, 혹여나 마지막 순간에 놀라운 반전의 기적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든 기대는 허무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는 때리면 맞고 조롱해도 대응하지 않은 채,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 십자가에서 숨졌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Giovan Battista Tiepolo
죽음 이후의 영광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3:12, 개역개정)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의 고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이신 일' (빌립보서 2:9-11)이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는 스스로가 고난의 종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성경의 예언대로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적극적으로 의도했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이 마지막이 아님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예언대로 고난의 종은 그 희생 너머에 영광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순교자 스데반은 그가 죽기 직전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심을 보았습니다(사도행전 7:56).
고난의 종 사역에 백성들을 초청하시는 예수
김세윤 교수는 그의 저서 「복음이란 무엇인가」(두란노) 에서 이렇게 서술합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이루려 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들로 예수 자신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구원을 입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다윗 왕조가 이 땅에서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그의 백성들을 통해 실현시키기 위함이다."
즉, 예수는 최종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를 그의 백성과 함께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부활한 이후 구체적인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 개역개정)
그렇다면 예수의 지상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어떻게 그의 나라를 실현시켜야 할까요? 힘을 키워 무력으로 국가를 정복해서? 뛰어난 실력을 갈고닦아 존경받는 인물이 됨으로써?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자신과 동일한 '고난의 종'이 될 것을 요청했습니다. 교회는 역사에 걸쳐 이 명백한 말씀을 지속적으로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르심은 존귀와 승리에로의 부르심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부정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그것 때문에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에 관해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29-30, 개역개정)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가복음 10:43-44, 개역개정)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가복음 9:23, 개역개정)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7, 개역개정)
그러므로 예수의 마지막 명령,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은 "나와 같이 고난의 종이 되어 죽으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가 그 사명을 위해 본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기록으로 한정된 문헌이 아닙니다. 구약은 언약 백성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며,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지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메시야를 소망하는 내용으로 가득찼고 그것은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는 그 당시 주류였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던 자들은 그를 알아보았고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했습니다. 예수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카리스마적 군주나 정복자의 모습이 아닌,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어둠에 있는 자들에게 빛을 주었고, 모두가 포기한 인생을 일으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온전한 순종으로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 메시지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소망이 구름을 잡는 막연한 것이 아닌 명백한 실재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참된 이스라엘'은 바로 고난의 종 예수를 통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복음 4:21,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