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
※ 표지그림 「설교하는 예수」, 구스타브 도레
“잘못 왔나...”
우리는 이제 성경의 핵심 주제인 '나사렛 예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이들의 소망이자, 선지자들로 말미암은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손을 통해 이방인에게 넘겨져 처형당하고 맙니다. 이번 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왜 구약에서 갈망하던 그 메시야인지, 그리고 그가 이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Intermission 장에서 본 것과 같이, B.C 63년 폼페이우스는 팔레스타인을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고 칼과 창으로 얻었던 유다의 독립도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로마는 그 땅의 일부를 헤롯 왕가에 맡겼고, 일부는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습니다. 신약의 배경이 되는 지역들은 사실상 가이사의 손길이 뻗치고 있는 곳이라고 간주하면 큰 무리가 없겠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시기는 '로마의 절대적 지배'가 온 이스라엘 땅을 덮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 줄 메시야를 갈망했습니다.
메시야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며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분의 선포와 사역이 모두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개역한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21, 개역한글)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개역한글)
"예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인데, 그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언약과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로 지금까지 달려온 우리에게 이 문장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구약과 신약의 유기적인 연속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소망을 파괴하고 더 나은 소망으로 대체시킨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행위 언약이 실패하자 신약의 은혜언약을 새로 만드셨다는 주장은 완벽한 오류입니다. 신약 시대에 '새 일'이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 일하신 결과입니다. 저자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를 강조합니다. "구약이 건물이라면 신약은 지붕이며, 신약은 구약의 완결편이다. 1막 없이 어떻게 2막을 이해하겠는가?" 복음서와 신약을 접하게 되는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창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이 갈망해온 미래의 소망을 현재 시제로("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 있다") 가져온 것입니다.
다시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던 시대 배경으로 돌아갑시다. 팔레스타인은 한 치의 틈 없이 로마의 지배 속에 있었고, 백성들은 오래도록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여러 분파와 형태의 집단들이 있었지만 크게 두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열심당 (Zealot) - 군사적 메시야를 고대하던 이들
여러 설교와 책들을 통해 접해본 적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들은 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군사력과 저항력을 키우고 준비하면 메시야가 오셔서 로마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이들의 행동양식은 주로 무력과 테러였습니다.
(2) 바리새인과 묵시주의자 - 거룩한 백성으로서 율법을 지키던 이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와의 투쟁을 선동하는 수많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났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쉽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영광 중에 임하실 것이며(다니엘 7:13-14), 이 순간을 위해 백성들이 할 일은 율법의 준수를 통해 순결하게 준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성경의 필사와 율법의 보존, 순종에 누구보다 관심을 보였지요.
그러나 이들의 바램과는 달리 현실은 차갑고 매서웠습니다.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는 나라, 즉 로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그 어떤 이민족도 로마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저항을 시도하는 나라마다 처절한 응징이 뒤따랐습니다. 열심당을 비롯한 군사적 투쟁의 움직임을 가이사는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묵시주의자들의 소망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들은 드라마틱한 종말을 가져올 징조들에 병적으로 집착했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늘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바라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마태복음 16:1-3, 개역개정)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던 것들의 취지는 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를 도래하게 만들지도, 거룩한 백성들을 낳지도 못했습니다. 수많은 율법의 조항들을 만든 그들은 스스로 위선자가 되었고 백성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막는다. 너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이여,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하나를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 그러다가 한 사람을 찾으면 너희보다 더한 지옥의 아들로 만든다. (마태복음 23:13-15, 쉬운성경)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을까요? 예수의 설교 내용에 묵시문학이 보여준 현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 사용한 체계적 방법들도 배제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비유였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태복음 22:2, 개역개정)
이 땅에서의 우리는 사단 권세가 주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근본적인 결핍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반면 하나님 나라는 당신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곧 영생)입니다. 그곳에는 넘치는 풍성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4:26-27, 개역개정)
하나님 나라는 땅에 뿌린 씨와 같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도, 성도들을 처형해도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그 악을 사용하셔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개역개정)
하나님 나라는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오는 구원을 입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종교지도자들을 비롯한 유대인 대부분은 이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노골적으로 배척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메시야를 죽이다니! 왜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