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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Jun 11. 2019

피레네만 넘으면 그다음은 수월할 거야

산티아고 순례길 첫 번째 날


 이른 새벽 생장(St. Jean Pied de Port), 등산화 끈을 발목까지 동여매고 36번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동트기 전이라 어두웠고 마을 전체에 뿌연 안개가 자욱했다. 순례자들은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발끝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고, 배낭끈 길이를 조절하며 걸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하연이와 순례자 사무소에 가서 큰 배낭을 *동키 서비스로 다음 도착할 마을로 부쳤다. 물과 다이어리 그리고 순례자 여권이 든 작은 배낭 하나를 짊어졌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바닥에 닿는 등산 스틱의 마찰음과 생면부지 순례자들 발소리만 들리는 마을에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지역에 위치한 생장 피에르 포트에서 시작해 산티아고까지 약 800㎞에 이르는 프랑스 길의 첫날이었다.


*동키 서비스란 순례자들의 배낭을 다음 목적지까지 배송하는 서비스로 배낭 하나당 요금은 5-10유로.


 순례길 방향 표시인 노란색 화살표가 어디 있냐고 하연이에게 물으려는 찰나, 그녀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노란 화살표다!” 화살표를 보니, 멀고도 긴 순례길이 시작됐음이 느껴졌다. 앞으로 무수한 샛노란 화살표가 800km 길을 안내할 터였다.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 구간이 있으면 하연이와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렴풋이 보이는 순례자의 뒷모습을 따라가거나, 앞서 나간 순례자들이 임시로 표기해둔 돌멩이 화살표를 따라 걸었다. 누가 앞서 나가고 뒤쳐지거나 는 중요하지 않아 보였고 제각기 다른 걸음이지만,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숭고해 보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안내하는 표식인 가리비껍데기와 화살표

 프랑스 길이 두 번째인 하연이가 있어서 사전 정보 없이 배낭만 달랑 들고 걱정은커녕 설렘만 가득했다. 단 한 가지 걱정되는 건 첫날부터 힘들기로 악명 높은 피레네 산맥을 넘는다는 사실이었다.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에게 이 길을 걸을 거라고 말했을 때마다 입을 모아 말했다.

 피레네만 넘으면 그다음은 수월할 거야.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넘어야 할 첫 번째 큰 관문이었다. 순례자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를, 피 터지게 힘들다고 해서 피레네 산맥이라고 불린다고 할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힘들다고 했다. 가파른 길이 연이어 나와 숨이 턱까지 차서 언제 평지가 나오는지 의문이 들 때면, 완만한 길이 한 번씩 등장하곤 했다. 순례길 선배님들이 말한 대로 힘이 부쳤지만, 오르막을 성큼성큼 거침없이 올라갔다. 걸으면서 힘들 때면 한숨을 크게 쉬고 난 후 실소를 터트렸다. 큰 배낭을 다음 마을로 이미 보냈다는 사실만이 나를 위로했다.


 하연이는 힘든지 물에 젖은 종이인형처럼 오르막길을 올랐다. 그녀의 기분과 컨디션은 30분 단위로 바뀌었고, 달달한 핫초코나 시원한 맥주가 들어간다면 목소리 톤과 기분은 가파르게 상기되는 친구였다. 기분이 좋을 땐 노래를 흥얼거리고, 기분과 컨디션이 저조할 땐 익은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걸었다. 그럴 때면 가방에서 씹을만한 무언가를 쥐어주거나 슈퍼나 식당을 재빠르게 찾아야 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하연이는 힘들수록 고개를 숙인다.

 무수히 나오는 언덕들을 오르고 또 오르니, 조그마한 푸드 트럭이 보였다. 푸드 트럭을 보자마자 하연이는 눈이 커지더니 잠시 쉬고 가자고 말했다. 먼저 잔디가 폭신폭신해 보이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그 옆에 털썩 앉아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조망을 보고 있으면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간질였다. 뒤에서 잔디가 사그락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먹어.” 내게 삶은 달걀 하나를 내밀었다. 하연이는 푸드 트럭에서 사 온 삶은 달걀 2개와 핫초코 한잔을 사 왔다. 하연이에게 얼마냐고 물어보니 삶은 달걀 한 알이 1유로, 핫초코는 2유로랬다. 하연이는 ‘누가 저 돈 주고 저걸 사 먹어.’에서 누가를 맡고 있었고, 난 웬만하면 군것질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타입이었다. 하연이가 준 달걀을 까서 한입 베어 물었다. 포슬포슬한 노른자와 탱글탱글한 흰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입안에서 고루 섞였다. 금세 달걀을 해치우니 하연이는 핫초코를 마셔보라며 내밀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적당히 식은 핫초코를 호록 호록 마셨다. 입안에서 왜 이제 찾아왔냐는 듯 뜨거운 핫초코의 달달함이 입 안 가득 퍼졌다. 핫초코를 마시고 연신 감탄사를 내던 나를 보고 하연이는 더 마시라며 컵을 다시 내게 건넸다. 순례길을 걷기 전에 나에게 순례길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입에 닳도록 많이 말했던 음식은 ‘길 위에서 마시는 핫초코’였다. 평소에 핫초코를 좋아하지 않지만, 기대 없이 마셨던 핫초코는 쉬는 시간의 달콤함을 극대화시켰다.


 내 앞으로 영화 상영관처럼 색다른 풍경이 길게 이어졌다. 자연 속에 숨어서 노란빛을 뽐내는 화살표, 아침이슬을 잔뜩 머금은 하얀 들꽃들, 고지대에서 유유히 풀을 뜯어먹는 양 떼들, 파란 하늘에 몽실몽실 떠다니는 구름, 기분 좋게 등줄기 땀을 식혀주는 일렁이는 바람은 혹독한 첫날의 힘듦이 조금씩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이는 듯했다.

 구름 사이로 조금씩 새어 나오는 아침햇살도, 함께 걷는 순례자와 “Buen Camino."(좋은 여행 하세요)" 나누는 인사도 싱그럽고 따듯했다. 힘이 없을 때 오히려 배에 힘을 주고 입모양을 크게 벌려 말했다.  그 말은 순례자와 눈을 마주치면서 하는 말이었고 동시에 나에게도 하는 말이었으니까.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인사가 오고 갈까 가늠하며 순례길 Roncesvalles알베르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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