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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Aug 19. 2019

여행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제 친구는 걷기를 싫어하는 순례자입니다.

이름 : 최하연


좋아하는 음식 : 햄버거, 비빔밥, 볶음밥, 삼겹살, 떴다 철가방 중식당의 탕수육과 짜장면. 세상에 귀찮은 일이 많지만 먹는 일 또한 귀찮아서 고기, 야채, 소스를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하는 편. 혼자 여행할 땐 배고파 죽을 때까지 참다가 겨우 몸을 일으켜 첫끼를 사 먹는 여행자. 누가 옆에서 먹으면 안 먹는다고 해놓고 따라먹는 편. 그래서 조호영과 여행하고 인생 최고 몸무게를 찍은 경험이 있음.


특징 : 내가 아는 사람 중 호불호가 가장 극명한 사람. 기분이 좋을 땐 콧노래를 흥얼거리지만, 기분과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뒷골이 당긴다고 말하며 뒷목 잡음. 웬만하면 말 걸지 않는 게 최상책. 걷기나 운동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두 번 다녀옴. 여행을 싫어하는데 10개월 여행하고 돌아옴. 액티비티를 싫어하지만, 막상 같이 하자고 제안하면 다 함.


 16년 11월,  쿠바 아바나에서 하연이를 처음 만났다. 여행하며 언니들을 많이 만난 탓에 나도 모르게 하연이에게 언니라고 불렀는데, 언니라는 소리를 듣고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일그러지던 하연이의 얼굴이 내가 떠올리는 하연이의 첫인상이다. 하연이는 얼굴 표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조금은 까칠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친구라서, 성격이 둥글기만 하지 않고 뾰족한 구석이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날이 하연이를 본 첫날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하연이를 바라대로 트리니다드를 거쳐 다시 아바나로 돌아왔을 때 만나게 됐다.


 그러니까 하연이를 다시 만난 날은 쿠바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나는 멕시코로 떠나는 날이었고 새벽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하연이는 나에게 쿠바가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 그 질문을 통해 내 옆 침대였던 하연이와 쿠바에 대한 단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갈라파고스행 항공권을 미리 결제하지 않았더라면 쿠바 아웃 티켓을 찢어버릴까 생각이 들 정도로 쿠바는 내게 충격적으로 좋은 나라라고 대답했다. 쿠바는 이래서 좋고 저래서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중남미 여행에서 가장 좋을 여행지로 남을 거라고 단언했다. 반면에 하연이는 쿠바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은 여행지였다. 그래서 여행사를 찾아갔지만, 항공권이 비싸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연이는 쿠바에 오기 직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거기서 만났던 순례자들과 헤어져서 공허한 상태였다. 매일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그들과 함께 걷고 마시고 잠들었다. 따듯하고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다가 온 나라는 다름 아닌 쿠바였다. 푸른 하늘과 초록 빛깔의 산과 숲길을 걷다가 온 곳은 매연과 찌린내가 풀풀 풍기는 쿠바 아바나였다. 쿠바는 올드카 매연은 코를 찌르고 길거리는 더러운 데다 시끄럽고 뭐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보였다. 특히 내 마음은 시궁창인데 쿠바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현란하게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 게 짜증이 난다고 했다. 쿠바 길거리를 둘러보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친절을 베풀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하는 사람들뿐이었는데, 쿠바에 온 첫날부터 캣 콜링과 능청스럽게 사기를 치려는 사람뿐이었다고. 여행지의 첫인상은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감이 오는데, 쿠바는 도착하자마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나라라고 했다.


쿠바 여행은 별로라고 말하던 하연이를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겐 여행이란 조건 없이 항상 좋기만 한 거라 생각했기에 여행하는 하연이의 우울함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가장 놀랐던 건 겨우 이름만 간신히 알던 나에게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막힘없이 털어놨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만 해도 남에게 내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기보단 상대방에게 진실된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카멜레온이 천적에게 본인의 자취를 감추려고 색을 주변의 색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주변 사람들이 표정과 행동에 따라 내 표정과 행동을 변화시키기 일쑤였다. 그에 반해, 하연이는 롤러코스터 같은 쿠바에서의 굴곡진 마음을 여과 없이 털어놓았다.


 하연이는 쿠바를 이야기할 때는 울상을 짓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할 땐 입꼬리를 올린 채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대화할 때 동적이지 않은 하연이가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풍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할 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할 때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길을 걷고 온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건 하연이가 처음이었다. 하연이가 순례길을 이야기하며 한 달 동안 800km를 걷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걸을까 궁금했다. 그때부터 나의 순례길에 대한 궁금증은 날로 늘어갔다. 새벽 2시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공항 갈 시간이 되어 짐을 챙겨 나왔다. 아쉬웠다. 쿠바를 떠나는 것도, 하연이와 며칠 더 빨리 만나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싶어서였다. 어디서든 다시 만나고 싶었다. 공항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갖은 궁상은 다 떨며 택시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면서. 눈물을 공기 중에 흩뿌리고 나니 개운해졌다. 쿠바 사람으로부터 신날 때 음악이 아닌 자신의 흥과 리듬에 맞춰 춤을 춰도 된다는 것을 배웠고, 하연이를 보며 여행을 하며 이따금 우울함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새벽에 공항 택시를 타러 숙소 문밖에서 마중 나와준 고마운 사람들.

그 후로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를 거쳐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세상에 끝이라고 불리는 우수아이아에 갔다. 평소와 같이 숙소에 도착해 배낭을 풀고 옷가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쪽에서 발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나를 벙진 표정으로 쳐다봤다. 순간 몸이 얼어붙어 3초간 입을 뗄 수 없었다. 아아악. 뭐야. 하연이었다. 하연이는 우수아이아에 올 계획이 없었는데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를 같이 트레킹 하기로 한 친구가 여권을 잃어버려 문제를 처리하느라고 시간이 비어서 이곳에 오게 됐다고 했다. 우수아이아에 수많은 숙소 중에 같은 숙소라는 것도 모자라, 같은 방에 옆 침대라니! 그날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여행 이야기를 하다 아프리카 여행을 같이 가자는 약속을 하게 됐다. 각자 일정대로 남미 여행을 마치고 우린 아프리카 첫 여행지 이집트에서 만났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케냐 여행을 하고 다시 이집트에서 우리의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집트 샴엘셰이크 공항에서 선 게스트하우스 가는 길.

 같이 여행하는 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연이가 순례길 이야기를 할 때 표정을 보면 그곳이 궁금했다. 어떤 곳이길래 하연이는 매일 수십 킬로를 걸어야 하는 힘든 날들을 견디며 걸었을까. 가뜩이나 운동도 싫어하고 밥도 먹기 귀찮아하는 친구는 어떤 연유로 그곳을 그리워하는 걸까. 긴 여행을 하면서 순례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순례길에 대한 주제가 나올 때마다 하연이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은 말했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따듯했어. 단순히 프랑스 끝에서부터 시작해 스페인 땅을 걸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곳은 여행지 그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야.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어. 그냥 일단 가봐. 넌 분명 좋아할 거야. ’

 하연이부터 시작해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은 길 어딘가에 첫사랑을 꽁꽁 숨겨놓은 듯 아련히 품고 있었다. 궁금해서 갔다. 어떠한 여행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산티아고 길은 내게 유독 그랬다. 여행서적이나 블로그 글을 읽어도 직접 가지 않으면 모를 정체를 오감으로 느끼고 싶었다. 힘들면 힘든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끝없이 펼쳐진 평야 속 내가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길의 냄새와 새벽의 찬 공기 그리고 순례자들의 따듯한 품을 느끼고 싶었다.


 두 번째 세계여행에서 주요 일정은 물론 아이슬란드와 쿠바 그리고 산티아고 길이 었다. 루트를 짤 때 세 나라를 주축으로 짜서 일정이 비효율적이었지만, 가장 기대되는 여행지를 비교적 최상의 날씨에 여행하고 싶어서였다. 하연이가 달콤한 말로 순례길의 세계에 대해 입문하게 해 주었지만, 결국 같이 가자고 재촉한 건 나였다. 네가 산티아고 길이 그렇게 좋다고 노래를 불렀으니 했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흔쾌히 승낙했고 34일 동안 길을 걸었다.


 하연이에게 프랑스 길을 왜 두 번이나 걷냐고, 다른 길을 걸어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하연이는 말했다. “프랑스 길을 걸었을 때 기억이 너무 좋아. 그래서 또 걷고 싶은데?” 하연이는 뭐 하나에 푹 빠지면 웬만해선 다른 선택지를 거들떠보지 않은 우직함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려니 넘어갔다. 어제 순례길에서 만났던 Astin님의 영상을 보니, 하연이와 함께했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하연이가 프랑스 길을 다시 걸었던 이유도 연상됐다.

하연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는 말.


 하연이는 아끼는 노래가 있으면 스피커를 켜 내게 노래를 들려주는 친구였다. 한 곡을 다 들을 때까지 공간을 내어주었는데, 노래가 끝나면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물었다. “어때? 정말 좋지?” 좋지 않으면 어떤 표정으로 에둘러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겠지만, 하연이가 들려준 노래는 내 취향과 일치했다. 하연이는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때마다, 정말 맛있지? 너무 좋지? 하연이의 커다란 눈동자만큼 큰 물음표를 얼굴에 띄우고 물었고, 정말 좋다고 답하면 얼굴이 활짝 폈다. 같이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하연이의 최애들에 대해 들었는데, 그중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하연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로부터 2년 뒤 귀에 닳도록 들었던 순례길을 같이 걷게 됐다.


 하연이와 같이 걸어보니, 좋아하는 순간들은 이러했다.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소주 한잔 마신 아저씨처럼 캬- 이맛 때문에 순례길 걸을 맛이 난다고 할 때. 널찍한 테이블에 앉아 일기를 쓸 때. 펍에 가서 마시는 맥주 첫 한 모금이 땀을 단번에 식혀줄 때. 하연이는 길을 걸을 땐 죽상을 하고 걸었지만, 걷는 시간 이외에 모든 일과를 즐겼다. 그리고 내게 지금, 이 순간이 좋지 않냐고 묻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좋고 싫음이 명확한 하연이에게 좋아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을 자연스레 배우게 됐다. 하연이는 좋아하는 순간을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면, 햄버거를 먹고 있을 때 갑자기 멈춰서는 ‘푹신한 빵 사이에 담백한 소고기 패티와 아삭한 채소를 한입에 먹을 수 있는 햄버거는 정말 완벽한 음식’이라고 감탄하며 말한다든지, 테라스에 앉아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델 노래를 들으니 온몸에 전율이 일어난다고 말한다든지. 하연이를 금세 행복의 나라로 보내주는 건 알아차리기 힘든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연이는 싫음의 폭은 넓었지만, 좋음의 폭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하연이는 좋아하는 순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오감이 만족할만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감상에 흠뻑 젖어드는 능력 또한. 하연이와 내게 일종의 감상 시간이 찾아오면 우린 작은 감탄사만 내뱉을 뿐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연이와 나 사이엔 어떠한 말이 오고 가지 않아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감각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 사이에 어떠한 언어가 필요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고유한 평화로움이 나를 자주 울컥하게 했다.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하연이와 있으면 작고 사소한 상황들이 결코 작고 사소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만약 하연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덜 웃고, 덜 울고, 덜 우울하고, 덜 풍요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여전히 우울하면 애써 밝은 척하고, 기쁠 땐 방방 뛰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있을 땐 마음껏 행복해하고, 우울할 땐 구태여 남의 행복을 들춰보지 않고 내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 됐다.


 이뿐만 아니라 만나는 여행자마다 많은 질문을 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진한 그림자를 보면 카메라로 담아내는 감성도, 일기를 쓸 때 일과를 적어내기보다 감정선에 따라 하루를 갈무리하는 섬세함도, 누군가 내키지 않는 일을 제안했을 때 거절하는 단호함도 모두 하연이에게 배웠다.

순례길에서 하연이와 내가 좋아하는 시간. 반나절 걷고 알베르게에서 일기 쓰는 시간 그리고 해가 내리쬐기 시작할 때 진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시간.

 쿠바를 싫어하지만 쿠바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여행자와 쿠바를 사랑하는 여행자는 가끔 쿠바 이야기한다. 걷기 싫어하는 순례자와 걷기를 무척 좋아하는 순례자는 오늘도 순례길을 그리워한다. 이 둘은 언젠가 다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언제 어디로 떠난다고 단언할 수 없겠지만, 다시 떠날 거란 것을 하연이와 나 사이엔 어떠한 언어를 통하지 않고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다음엔 어디가 좋을까?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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