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 이제 자도 돼? ― 어머니와 아들의 마지막 시간들
2024년 새해 첫날, 어머니는 전과 다른 투정을 부리셨다.
"새해인데, 나도 좋은 데 가서 밥 한번 먹고 싶어."
따로 내 방까지 오셔서 문을 열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표정도 말투도, 너무 엄숙해서 오히려 귀여운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내색을 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동분서주하며 가까스로 당일 예약 가능한 가장 가까운 호텔 레스토랑을 찾아 저녁을 함께했다.
이상하리 만치 한산한 식당의 창가 쪽 자리.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예뻤다. 새해에도 아무 계획 없이 가만히 있었던 우리가 야속하셨는지 어머니는 조금 뾰로통해 계셨고, 그 때문에 사소한 언쟁도 있었지만 . . .결국 좋았다, 이런 시간이 허락된 것이. 정말 명절이구나, 이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구나. 한국에서의 삶은 이런거구나. 내가 이렇게 살았을 수도 있구나.
미국에서 오래도록 혼자 살아온 내게 명절맞이 외출은 오래도록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한국에 있지만, 일에 치어사는 누나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마흔 넘은 싱글이면 다 그럴법한 이유가 있다. 아무튼, 자식들의 그런 단조로운 삶에 덩달아 억울하게 익숙해진 어머니의 마음 속 무언가가,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어한 것은 아닐까.
결과적으로 그때 누나가 찍어준,
마주보는 어머니와 나의 사진이,
우리의 마지막 함께한 사진이 되었다.
너무 소중해서 정면으로는 볼 수 없고, 자꾸만 흘낏거리게 되는 사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뇌전증 확진이 있었다. 지난 몇달 동안 보았던,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는 일, 그리고 갑자기 몸이 굳어지며 뒤로 넘어가는 증상이 그렇게 설명되었다. 약을 많이 힘들어하셔서, 1월 중순경, 약을 한 차례 바꾸었다. 그 와중에도 혈뇨는 좀처럼 줄지 않았고 어머니는 점점 예민해져 갔다. 나와 누나가 걱정되어 소변색을 확인하려 하거나, 물어보면, 어머니는 "아이, 계속 나와!"라며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시고, 소변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나와 누나는 노력했다. 모든 것을 던졌느냐고 묻는다면, 뭐라 할지 모르겠다. 어지러움의 원인을 찾기 위해 척추 병원에, 이비인후과에,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의 병원들을 순례하듯 다녔다. 하지만 모든 병원의 의사들은 암과 출혈이 있는 노년의 환자라는 말 앞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기를 주저하는 듯했다. 우리는 분명 싸우고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벽에 주먹을 내지르는 기분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이, 어머니의 시간을 아주 조금 연장시킬 수는 있어도, 그 거대한 흐름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그 절망적인 예감을 애써 외면하며, 다음 병원을 검색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조금 더 먹어보려고, 조금이라도 더 걸으려고, 힘들어도 실내 자전거 페달 한번이라도 더 밟으려고 애쓰셨다. 돌이켜보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자식들과 함께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남은 삶의 의지를 불태우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곁에서 지켜보며 손도 잡고 말도 많이 했지만, 결국 홀로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어려운 싸움. 모든 결과를 알게 된 지금, 당시 어머니의 외로움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육체적 고통과 남편을 떠나보낸 충격에도, 자식들을 위해 살아보려 하지만, 세상 그 무엇도 어머니의 지속을 기대하거나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듯한 느낌. 내가 지금에서야 명징하게 보게 되는 그런 차가운 세상을 어머니는 느끼지 않으셨기를 바라지만, 느끼셨을 것이다. 나보다도 더 분명히. 그래서 더 아프다.
그 무렵, 나는 종종 스터디카페 구석 자리에서 수능 수학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원하던 전공의 학교 편입 1차 합격 후 면접까지 마쳤지만,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함께 면접을 본 다른 지원자들은 모두 너무나 어리고 총명해 보였다. 면접 대기실에서, 젊지 못해 어린 그들 사이에서 나이 많은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고, 긴장이 되어 면접에서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수능시험을 볼 생각을 하던 그런 어느 날이었다. 아니 그냥 뭐든 붙들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모처럼 스터디카페 옆 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때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쇠젓가락의 머리 부분이 똑하고 부러졌다. 나는 불길함을 느껴 그 때부터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았다. 조짐이 좋지 않고,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휴대폰에 짧은 알림이 울렸다. '최종 합격'. 나는 몇 번이고 그 두 단어를 다시 읽었다. 책을 허둥지둥 가방에 챙겨 넣고 스터디카페를 나섰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해주고 싶은 단 한 사람, 어머니의 얼굴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는 전력 질주해서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나 합격했어. 나 또 . . . 대학생이야.”
어머니는 내 기쁨을 훌쩍 뛰어넘는, 깊은 안도감을 보이셨다. 멀쩡히 미국에서 잘살던 아들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백수로 한국에서 1년 넘게 어머니 곁에만 있으니, 그 마음이 어떠셨을까. 한마디도 내색하신 적은 없지만, 불안감이 있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럼 이제 한국에서 계속 사는거야?”라고 물으시며 정말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좀 기운 내, 알았지? 내가 졸업해서 더 잘 돌봐줄께.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야지."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안도감이 느껴지는 옅은 미소로 충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백화점에서 손을 잡고 걸으면, 어머니는 “아이, 땀나. 챙피해”하며 슬쩍 손을 빼곤 하셨다. 내가 잠시 다른 곳을 보는 척 손을 놓으면, “치, 너 챙피해서 손 빼는 거지!”라며 내 옆구리를 쿡 찌르시던, 시크하면서도 귀여운 할머니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다시 꽉 잡으며 웃곤 했다.
개강을 하고 나는 편입생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느라 밤늦게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피곤에 지쳐 현관문을 열면, 어머니는 거실 소파에 앉아 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모습이 너무도 짠하고 예뻐서, 나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어머니를 꼭 안아드렸다. 그리고 매번 속삭였다. "엄마, 안 자고 기다렸어? 늦게 다녀서 미안해. 많이 사랑하고, 항상 고마워." 그러면 어머니는 내 품에 안겨 배시시 웃으며, 우리의 익숙한 질문을 던지셨다.
"나... 이제 자도 돼?"
나는 일부러 눙을 치며 대답했다. "음... 자꾸 무리한 부탁하면, 곤란한데.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봐줄게." 그러고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침실로 모셔다 자리를 봐드리곤 했다.
항상 시크하게 애정 표현이 없던 어머니가 갑자기 그렇게 변해가는 것을 어색해 할 법도 한데, 그 때의 나는 그냥 그런 따스한 어머니의 모습이 좋았고, 걱정의 마음은 갖지 못했다.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걱정 했어야 할까? 더 신경 썼어야 할까? 지금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의 어머니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의 어머니는, 미국에서 내가 전화해서 오래 이야기하면, “나 드라마 봐야하니까 끊어. 나한테 자꾸 전화하지 말고, 연애를 하든 친구를 좀 사겨”라고 하시며 피식 웃고 전화를 끊곤 했다. 시크하고 무뚝둑하면서도 애정표현을 살짝은 흘리시던 어머니.
밤의 의식이 안도와 책임감의 확인이었다면, 낮의 우리에게는 '꽃'이라는 우리만의 주문이 있었다. 귀국한 직후, 나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엄마,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우리 곁에 꽃처럼 예쁘게 있기만 해. 나머지는 우리가 다 할게." 그 후로 나는 종종, 어머니의 눈을 마주 보며 장난스럽게 외치곤 했다. "꽃~!" 그러면 어머니는, 소녀처럼 웃으시며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하셨다. "꽃~!" 그 짧은 단어가 오가는 순간, 우리는 잠시 모든 고통을 잊고,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엄마와 아들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은 시간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상태는 확실히 나빠지고 있었다. 물을 끓이지 못하거나, 컵라면을 만들지 못하거나, 커피를 내리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누나는 어머니 걱정에 작은 사진들을 찍어 집안 곳곳에 붙여놓기 시작했다. '커피포트 쓰는 법', '텔레비전 리모컨 쓰는 법', '문 열고 잠그는 법'. 하나의 사진도 아니고, 매직으로 큼지막하게 쓴 손글씨와, 단계별로 1, 2, 3이라고 표시된 사진들. 누나가 자상해질수록, 그만큼 어머니의 일상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어머니는 때론 깊은 혼돈에 빠져 말을 잇지 못하셨고, 스스로가 아주 쉬운 일도 하지 못하는 것에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셨다. "아이 참! 내가 왜 이것도 못해!"라며 나직이 울부짓는 모습에, 난 “다 괜찮아, 금방 좋아져. 날 믿어. 젊은 사람도 가끔 그래!”라며 또 수다스러워 졌지만, 내 마음이 점점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3월 31일, 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왔다. 4월 18일 긴급 수혈을 위해 응급실을 찾았으니, 어머니가 쓰러지시기 약 보름 전이었다. 나는 큰맘을 먹고 고급 호텔 중식당을 예약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며 누나가 만류했지만, 그냥 너무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를 위해 구입한 휠체어를 처음 써보았다. 나도 처음 가보는 그 특급호텔은 다행히 누나 직장 옆에 있어서, 누나는 몇 번 와본 눈치였다. 누나는 선물한 새 안경을 쓴 어머니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왠지 담담한 느낌이었다. 그리 웃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삐진 듯한 표정은 아닌, 잔잔한 느낌이랄까. 그날 어머니는 창밖 야경을 보며, 중년의 미혼 자식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표정은 차분했고, 창밖을 내려다보는 눈은 깊었다.
그 깊은 눈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문득, 아주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미국에서 박사학위 디펜스를 하던 바로 그날, 어머니는 첫 번째 암 수술을 받으셨다. 내게는 그 사실을 숨기고, 디펜스 전날 전화통화하며 ‘화이팅’을 외쳐주시던 어머니. 아들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날, 당신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짐이 될까 봐,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냈던 여인. 그런 강인한 분이, 이제는 밥 한번 먹고 싶다는 투정을 내비치고, 자식들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그 고요함은 체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주는 마지막 선물, 즉 평온함의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 때, 우리는 어머니의 위태로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심각성을 다소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외식도 나오시고, 대화에도 아무 문제가 없고,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의도적으로 안정감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항상 불안한 우리들이 마지막에 기대는 존재였으니까. 누나는 직장에서, 나는 새로운 학교 생활에 너무 정신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다소간의 평화에 취했고, 그 끝의 급격한 낙하가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날이 찾아왔다.
***이 글은 경험에 기반한 오토픽션(Autofiction)으로, 등장하는 인물, 지명, 그리고 일부 내용은 허구적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