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진 길을 굽이굽이 올라 숙소에 이르렀다. 수원의 밤은 예상보다 적막했고, 좁은 골목은 하염없이 길어 보였다. 문가에 서자 마당의 고양이 몇 마리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주인장의 인사에는 낯선 이를 경계하는 망설임이 아닌 익숙한 사람을 맞이하는 반가움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가 머문 곳은 스테이 이도. 수원 토박이 부부가 실제로 거주하며 오랜 시간 가꿔온 집이었다. 투숙객에게 열려 있는 방 두 개 가운데 ‘골목길’ 방을 골랐다. 창문 너머로 장독대와 이웃집이 비쳤고, 그 소박한 장면이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아이도 방이 마음에 드는 듯 침대 턱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다가 둥그스름한 조명의 주황빛을 관찰했다. 아이만의 방식으로 적응한 셈이었다.
주인장은 30년 거주 경력을 살려 나름의 수원 가이드북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목록에 적힌 식당이나 카페를 마음껏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그중 밤까지 불을 켜두는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산책 삼아 간단히 간식을 사러 나서기로 했다.
다시 어둑한 골목길을 조심스레 내려갔다. 군데군데 불이 켜진 집들 사이로 생활의 기척이 희미하게 번졌다. 가까이에 화성행궁이 있었지만 안까지 들어가지는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겉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은은한 달빛 아래 고요히 서 있는 한옥들. 하지만 바람이 차가워 아이는 이내 유아차에 몸을 맡겼다.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나왔을 때 오히려 주변이 더 깜깜해졌다. 장안사거리에 자리한 파트브리제는 9시까지 문을 연다고 했다. 아담한 가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유난히 따스해 보였다. 천천히 문을 열고 유아차와 함께 들어가도 될지 여쭈었다. 스콘과 휘낭시에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늦은 시간 탓에 매대가 거의 비어 있었다. 남아 있던 살구잼 스콘과 얼그레이 스콘, 클래식 휘낭시에를 몇 개 겨우 집어 들고 나왔다. 선택의 여지가 적은 밤이었지만, 고민도 줄어들어 좋았다.
아이가 잠든 뒤, 우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디저트를 꺼냈다. 불이 꺼진 방에서 스콘을 살살 베어 물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작은 소리조차 치명적이었기에 웃을 여유는 없었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한 침대에서 자보기로 했다.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남아 있던 터라, 여분의 베개를 침대 아래쪽에 놓아 작은 가드를 세우고 겉옷으로 다시 한번 둘러 요새를 만들었다. 부모가 된 이래 우리의 밤은 사소한 대비의 연속이었다.
다음 날 아침, 주인장이 직접 조식을 차려 주었다. 따뜻한 밥과 국, 계란말이, 나물 반찬 서너 가지가 가지런히 놓였다. 내 몫을 아이와 나누어 먹었는데 아이는 내가 먹는 속도를 기다리지 못할 만큼 맛있게 먹었다. 특히 계란말이는 한 입만 남기고 모두 아이의 차지가 되었다. 주인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친 후 집 안 곳곳에 차곡차곡 쌓인 책을 구경하고, 은근슬쩍 다가온 고양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고양이가 발밑을 스치고 지나가자 아이가 화들짝 놀랐다가 우히히 웃음을 터뜨렸다. 낯선 곳에서의 작은 교감들이 여행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단 하룻밤이었지만 떠날 시각이 되자 아쉬움이 컸다. 유독 다정했던 공간이라 그런지 짧은 시간에도 금세 정이 들었다. 주인장의 배웅을 뒤로한 채 이제는 밝아진 대로변으로 향했다. 행리단길에서 가족 캐리커처를 그려볼까 싶었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계절 탓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결국 한 골목마다 보이던 네 컷 사진관에 들어가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작은 밀실에서 셋이 찰싹 붙어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아이의 보드라운 볼의 감촉을 느끼며 미소 지었지만 아이는 답답했는지 우리를 밀어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타필드 수원에 들러 크리스마스 트리를 감상했다. 아이는 트리에 주렁주렁 달린 인형을 발견하더니 우리에게 명령했다. "안아." 11월부터 온갖 트리를 보았지만 아이는 매번 흥미로워하는 눈치였다.
첫 여행의 불안했던 마음과 달리
이번 여행을 지나오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 조금 자신이 생겼다.
세 도시를 부지런히 넘나드는 동안,
나는 부족한 줄도 몰랐던 어떤 결핍을 차곡히 채우고 있었다.
'다시, 여행' 시리즈 중 이천 마지막 편입니다.
아이와 함께한 두 번째 여행을 조용히 맺어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준비합니다.
— 호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