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수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Nov 14. 2019

[친절한 금자씨] 금자씨의 폭력에 주어진 정당성

그녀가 '마녀 이금자' 가 아닌 '친절한 금자씨'인 이유



친절한 금자씨는 금자의 원맨쇼다. 제목에서부터 보여주듯, 이영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끌고 가야 한다. 감독은 왜, 페미니즘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10년도 전인 2005년에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박찬욱 감독의 후회는 이 캐릭터, 미도에서 시작되었다. 출처: 올드보이


감독은 감독의 전작 ‘올드보이’에서 강혜정이 끝까지 수동적인 캐릭터로 남는 ‘미도’의 역할이었던 것이 맘에 걸려 여성 서사를 중심으로 한 ‘금자씨’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박찬욱 감독은 씨네 21의 ‘올해의 감독’에 선정된 소감에서


“최근의 영화계 성차별을 포함한 여성 혐오의 현실에 대해 남성으로서, 감독으로서, 비교적 고참 감독으로서, 그리고 제작자로서 사과한다. 이런 현실에 용기를 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성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라고 밝혔다. 그는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이 경향성은 이후 감독의 최신작 ’ 아가씨’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는 깨어있는 사람은 고급스러운 변태가 될 수밖에 없다는 나의 (개인적) 가정을 증명했다.


고오급 변태가 아니면 이런 씬 못 만든다. 출처: 아가씨


박찬욱 감독은 원래 ‘복수 3부작’ 같은 것을 준비하고 만든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가 일관되게 복수를 다루자 사람들이 그에게 3부작을 만들려는 것이냐 물어봤고, 감독은 단지 ‘나 복수에 관심 많은데.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라는 생각이었다고.



감독의 전작 ‘올드보이’가 한국 관객들에게 ‘한국 영화도 이만큼 한다’라는 국뽕을 선사한 데다, ‘대장금’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이영애의 파격 변신이 예고되어 있었으니 ‘친절한 금자씨’는 감독으로서도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게다. 하지만 박찬욱은 관객의 선택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금수저만 부릴 수 있는 배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신감 일지도 모른다.


무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무려 디카프리오에게 추천했는데, 영화 세 편쯤은 말아먹어도 괜찮다.


자, 영화로 돌아가서 다시 영화의 주인공 ‘이금자’를 살펴보자. 감독은 그의 첫 여성 서사 영화에서 어떤 여성을 세우고 싶었을까? 금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고 좌절하는 대신, 아이 아빠를 찾아가 책임지라고 난동을 부리는 대신 침착하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선택한다.


책임 질 능력도 결심도 없는 고등학생 남자친구에게 매달리는 것은 그다지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차라리 자신에게 ‘섹시하다’고 말했던, 경제적 능력이 있는 교생에게 의탁하는 것이 낫다. 물론, 그것은 그녀의 최악의 결정이 되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냉철한 판단이 가능한 ‘멋진 여성’이다. 요즘 말로 ‘걸크러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


금자씨를 찍을 때 이영애의 나이는 34이었다.  출처: 친절한 금자씨


그 상황에 대한 옹호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임신에 대한 결과를 여성 혼자 ‘독박’ 쓰는 상황은 어떻게 봐도 옳지 않다. 하지만 어쩌나, 아이는 벌써 생겨버렸고 나를 도와줄 법은 없는 것을.


하지만 그녀 또한 사람이다. 누명을 쓰고 딸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던 그녀의 과거가, 어찌 서럽지 않았겠는가. 감독은 부부 강도단 ‘소영’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금자가 처음 입소했을 때 하루 종일 울기만 하는 울보였다는 것을 언급한다.


우는 것은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세상이 지랄 맞고 불공평해도, 우는 것은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형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음험해 보이는 전도사의 호감을 사고, 훗날 도움이 될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한다.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천사 같은 ‘친절한 금자씨’


많이 먹고 빨리 죽어 ^^. 출처: 친절한 금자씨


금자는 거침없이 사람을 해하고 죽인다. 그녀는 자신을 가둔 법 대신 새로운 윤리/도덕을 찾은 듯하다. 죽어 마땅한 자들은 죽지 않고, 힘없는 자들은 핍박받는 세상. 금자는 ‘마녀’를 죽였지만 아무도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다. 금자는 출소 후 본심을 드러낸다. 음흉한 미소를 짓고 용서를 강요하는 전도사에게는 ‘너나 잘하세요’라고 쏘아붙이고, 양희에게 보였던 친절은 간데없다.


전도는 개뿔, 너나 잘하세요.  출처: 친절한 금자씨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가 된 것일까? 그것은 아닌 듯 하다. 금자는 거처를 마련한 후 지체하지 않고 원모의 부모를 찾아간다. 손가락을 자르며 용서를 비는 금자. 그녀는 윤리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의’를 찾은 것이다. 사회나 종교에서 말하는 윤리가 아닌, 자신이 믿는, 생각하는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 이것은 복수임과 동시에 속죄의 과정이다.


복수를 다루는 영화들은 반드시 그 복수의 정당성을 관객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이 노력이 부족하게 되면 그 영화는 더 이상 복수에 대한 영화가 아닌, 끔찍한 범죄물이 되어버린다.


딸이 납치되었기 때문에(테이큰), 강아지가 죽었기 때문에(존 윅) 같은 이유를 들면, 대체로 감독들은 ‘이 정도만 해도 관객들은 충분히 공감하니까’ 그 복수를 시행한다. (사실 ‘개저씨’ 존 윅은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존 윅은 우리가 정당한가를 생각하는 동안에 43명을 더 죽인다)


테이큰은 '복수극'이라기보다 '복수를 빙자한 액션'이다.  출처: 테이큰


리암 니슨과 키아누 리브스는 앞뒤 잴 거 없이 초인적인 호쾌한 복수를 할 수 있으니 고민이 필요 없다. 관객이 ‘테이큰’과 ‘존 윅’에서 기대하는 것은 복수심의 깊이와 고뇌 따위가 아니니까.


타란티노와 박찬욱이 서로를 칭찬하는 이유는 아마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박찬욱과 타란티노는 캐릭터를 매우 섬세하게 쌓는다. ‘메인디쉬’를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은 정확하게 계량되고 조리된 고명 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류의 복수, 이우진의 복수, 이금자의 복수는 감독이 깔아놓은 다양한 고명과 함께 꽃을 피우고, 관객의 마음에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새긴다.


타란티노는 짧게 등장하는 강도들에게도 스토리를 맡긴다.  출처: 펄프 픽션


박찬욱 감독은 “’ 복수'라는 주제는 일상의 분노를 억누르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흥미 있는 주제다”라고 말했다. 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는 아마 복수를 긍정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분별 있는 사회인으로서 그는 복수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영화라는 ‘예술’을 손에 쥐고 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울분으로 가득 찬 세상에 숨틜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박찬욱의 영화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그는 또 복수를 마친 이들의 표정을 통해 그 복수가 구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충분히 보여 준다. 그렇게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에게 공감해주면서도 그들을 말린다. 정말 잔인할 만큼 완벽한 깐느 박.

매거진의 이전글 [매드맥스]는 페미니즘 영화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