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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14. 2019

[매드맥스]는 페미니즘 영화일까?

페미니즘 논란과 작가가 생각하는 페미니즘





매드맥스의 스토리는 굵고 간결하다.


맥스가 임모탄에게서 도망치는 과정에서 퓨리오사를 만났고, 그녀와 협력관계가 되어 푸른 땅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 조지 밀러 감독은 다른 ‘거장 감독’들처럼 플롯을 비틀고 꼬아 새롭고 독창적인 연출(사람들이 소름 끼친다, 혹은 천재적이다 말하는)을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고, 그런 것은 별로 ‘매드맥스’스럽지가 않다.


매드맥스는 관객과 심리전을 하는 대신 날것 그대로의 액션을 쏟아붓는다.

모래폭풍이 몰아치고, 장대에 매달려 날아다니는 워보이들과 8기통이 뿜어내는 우렁찬 배기음,

빨간 내복의 로커가 연주하는 헤비메탈이 고막을 파고들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액션은 장난처럼 느껴진다.


소녀떼를 추적하는 빨간 내복 교회 오빠.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이런 영화가 복잡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제대로 즐길 수 없다.

간결한 스토리는 오히려 감독의 선물인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맥스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영화의 구도는 ‘퓨리오사’와 ‘임모탄’ 사이의 대결이다.

임모탄은 맥스 같은 피주머니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퓨리오사는 자신의 소중한 재산인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빼돌렸고, 아기주머니인 그들만 돌려받는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


강철 팬티를 벗고 해방된 브리더들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퓨리오사는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이미 ‘아기주머니’가 되는 것을 거부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사령관의 위치를 따낸 여성이다. 그녀는 왜 임모탄의 여자들을 빼돌리게 되었을까.


퓨리오사와 함께 길을 떠난 브리더(Breeder)들은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그녀들의 삶은 안락하고, 풍족하고, 절대적인 보호를 받는다. 워보이가 겪는 전쟁과 노동, 하층민이 겪는 굶주림과 갈증도 없지만 그들은 대신 하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워로드 임모탄의 아이를 생산하는 것. 그래서 푸른 땅을 찾아가는 여성들은 혼란스럽다. 때로 안락했던 임모탄과의 삶으로 돌아가려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소유물이 아니고, 아름다운 외모로 인해 얻은 안락함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한 대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피지배 계층인 워보이들은 완벽하게 세뇌되어 협력이 불가능하다. 젖을 생산하는 가축의 삶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구출에 응할 수 없다. 퓨리오사는 ‘특혜를 누리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여성들을 이끌고 새로운 세상을 찾는 것이다.


퓨리오사는 'Thing'이 아니었던 유일한 여성이다.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사실 여성들이 더 많은 특혜를 누리고 있잖아!’라는 공격은 합당하지 못하다. 군인 겸 일개미로 굴려지는 남성(워보이)은 여성의 삶이 편안해 보인다며 부러워 하지만 사실 여성의 삶도 다르지 않다. 아기 주머니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칸트는 일찍이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며 목적으로 대하라' 했다. 게다가 늙으면 밀크 마더가 되고 '아름다움'이 없으면 밑바닥 인생이 된다. 피지배 계층은 그 높낮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수단'이다.


생산 능력을 잃으면, '이것'이 곧 브리더들의 미래가 된다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그 과정에서 여성운동에 참가한 임모탄의 다섯 아내들은 피아 구분을 확실히 한다. 워보이는 대적해야 할 적이 아니며, 여성과 같은 피지배 계층일 뿐이다. 워보이는 세뇌되었으니 임모탄을 숭배하며 퓨리오사의 탈주를 막아서는 것도 이해를 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워보이들에게 퓨리오사 일행은 분명한 피해를 입지만, 항상 칼끝은 임모탄을 향해 있다. 감독이 그리는 페미니즘 어젠다는 남성과의 연합이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퓨리오사와 맥스를 보며 점점 강인해진다. 총을 장전하고, 공격을 막아서고, 워보이 눅스를 설득한다. 모두가 퓨리오사처럼 전투적이 될 필요는 없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 고달프지만 그게 인간이다. 상처가 아프다는 스플렌디드에게 퓨리오사가 '여기선 모든 게 다 고통스러워'라고 대답한 것처럼. 투쟁은 귀찮고 고통스럽고 '사서 고생을 하는 과정'이다.






진짜 여성 영화는 ‘난 여성 영화예요! 저를 관람해주시면 여성 인권이 올라가요!’라고 소리 지를 필요가 없다. 맬리사 매카시가 주연한 ‘스파이’는 뚱뚱한 여성을 희화화하거나 스테레오 타입을 덧씌우지 않으면서도 여성 주연 액션물을 만들어 내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도 여성 서사 영화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지만 그의 페미니즘을 훌륭하게 녹여냈다.


솔직히, 조금 희화화 하긴 했는데 그걸 바람직하게 그리진 않으니까.  출처: 스파이


영화를 하나의 예술로 생각한다면, 주제의식을 이마에 새겨놓고 나오는 영화들은 너무 촌스럽다. 걸캅스가 호응을 받지 못한 이유는 그게 여성 영화여서가 아니라 의도가 빤히 보이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PPL도 너무 티 나게 넣으면 빈축을 사는 것처럼, 주제의식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스며들어야 한다.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눈치채지 못할까 주저할 필요는 없다. 페미니즘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인류 절반의 무관심과 의식이고, 의식은 아주 천천히, 천천히 변화한다. 오히려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의식적 반감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조지 밀러 같은 거장이 여성 영화를 만들어준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그는 ‘여성 영화’에서 멈추지 않고, 남과 여는 함께 지배계층과 사회적 인식에 대항해야 하는 존재임을 피력한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페미니스트 어젠다’를 가지고 있었나? 샤를리즈 테론의 인터뷰를 보자.


“사람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갑자기 경직되는 면이 있어요. 무슨 우리가 강연대위에라도 올라선 것처럼 말입니다. 조지 밀러 감독은 그저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복잡하고 흥미진진한 존재라는 걸 이해하고 보여줬을 뿐이에요. 그렇게 진실을 이해했기에 조지 밀러가 결국 놀라운 페미니스트 영화를 만든 겁니다.”



팔이 없고 머리를 빡빡 밀어도 아름다운 샤를리즈 테론. 출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그러니까 이 영화는 페미니즘 영화가 맞다. 혹자는 말한다.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며 남성을 공격하고, 밥그릇 찾기에 급급하다. 그런 집단을 어떻게 지지할 수 있나?' 대답은 간단하다. 지지하지 않으면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날 공격하는 사람을 감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성 이슈에 대해 관심을 거두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이고, 내가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와 공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테니까. 어차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레디컬 페미니스트는 '도를 지나쳤다'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덕에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말콤 X의 급진적 분리운동에 모두 공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흑인 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고 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주사파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어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부정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부정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서 단어가 좀 달라졌다), 레디컬 페미니즘에 동조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완벽한 페미니스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페미니스트라면 모든 사람을 주체로 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모두 자신의 눈으로 상대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타인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객체로 보일 수밖에 없고, 나도 때때로 (당연히) 여성을 객체로 본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여성 그 자신도 남성을 객체로 보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페미니스트가 완벽하지 않다고, 내로남불이라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깨달음을 얻은 초인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결론은 그냥 노력하자는 거다. 쓸데없는 논쟁거리를 만들지 말자는 거다. 긍정적 방향으로 이어지는 진지한 논의라면 모르겠으되, '페미 정권' '페미 연예인' '페미 영화'를 말하며 린치를 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영화에 대한 시카고 트리뷴의 글에서, 재미있는 칼럼이 있어 한번 소개해보겠다.



(2015년 5월 18일 시카고 트리뷴 기사 번역)

렉스 W. 훕케 (Rex W. Huppke)


사람들이 경고를 하더라구. 새 아포칼립스 스릴러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질주”를 보지 말라고 말이야.

남성을 무력화시키는 페미니스트 선전영화를 폭발 장면으로 가득 찬 액션 영화로 잘 위장했다고 그러던데.

근데 내가 소위 남성 권리 옹호자들이 이 영화를 불매 운동하자고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까?

아니, 안 그랬어. 앞으로 돌진해서, 남자답게, 대담하게 아내에게 여쭤봤지. 나 영화 보러 가도 괜찮냐고.


그리고는 넘실대는 내 남성호르몬을 타고서 극장으로 향했어.

우두머리 수컷처럼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서 사내답게 스크린에 눈을 고정시킨 다음 어떤

리버럴 페미니스트 개소리가 나오든 한 판 붙어보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했어.


새 매드 맥스 영화를 놓고 벌어진 논란에 대해 못 들어봤다면 간단히 설명해줄게.

미국이 여성화되고 있고 진짜 사내들 – 터프하고 계집애 같지 않으며 남성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

이 사회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어.

이 남자들은 때로 소위 “메니니스트” 라거나 “남성 권리 운동” 회원이라든가 그 외 이러저러한 기타 등등

“따옴표” 안에 들어가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말이 안 되는 명칭들이거든.


왕들의 귀환이라는 웹사이트 – “근육질 이성애자 남성”을 위한 유명한 블로그야 – 에 누군가가

매드 맥스 영화가 왜 남성들에게 공격적인지 설명하는 글을 썼어. 글을 쓴 사람은 영화 보는 걸 거부하고 있지.


먼저, 이 영화에는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강인한 여성 캐릭터가 나와서

대담하게도 매드 맥스에게 명령을 내리지. 두 번째로, 아마도 최악일 텐데,

“보x의 독백” 극본을 쓴 여자가 이 영화감독의 자문을 맡았어.


블로그 글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건 페미니즘 강의를 여러분 목구멍에 확실히 쑤셔 넣기 위해 만들어진 수단입니다. 여성이 체격, 힘, 그리고 논리 등 모든 면에서 남성과 동등하다는 비유를 주장하기 위해

페미니스트들과 할리우드 좌파들이 사용하는 (실패하겠지만) 트로이의 목마란 말입니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선을 흐리게 만들고 남성을 위한 여성,

여성을 위한 남성을 더 망가뜨려 놓기 위해 그들이 사용하는 속임수죠.”



그리고 이 사내는 남자들에게 영화를 보지 말라고,

“토네이도처럼 솟는 불길과 폭발 장면”에 낚이지 말라고 열광적으로 외치지.

나한테 문제가 되었던 건 두 가지야.


1) 난 토네이도처럼 솟는 불길과 폭발 장면을 너무 좋아하거든.

2) 내가 어떤 영화를 볼 수 있다거나 볼 수 없다는 걸 다른 누군가가 결정해 주는 것보다 더 남성적이지 못한 걸 상상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난 다 큰 남자답게 차려입고 남성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악몽 같은 영화를 똑바로 대면하기 위해 나섰어.

참혹한 경험이었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얘기해주자면, 이 영화에는 여자들이 몇 명 나와.

그건 내가 여성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단 얘기지.

그것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져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총격전이라든가 수백 명의 남자 배우들,

그리고 공중에서 사람 몸이 꿰뚫리는 장면 같은 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어.


근육질 이성애자 남성에게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영화는 스크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남자들만 가득 들어찬 영화라는 거 다들 알지? 매드 맥스는 이 측면에서 완전 낙제야.

(영화 매드 맥스 말하는 거야. 캐릭터 매드 맥스는 터프하고 멋져. 진짜 사내들의 사내거든.)


여성들이 영화에 침입한 것에 더해 테론의 캐릭터 이름은 임페라토르 퓨리오사 야.

전형적인 계집애 이름이지. 메니니스트 친구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퓨리오사는 매드 맥스랑 똑같이 사람을 죽이고, 죽이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을 하지 않을 때면 먼 곳을 바라봐.


이런 바보 같은 소리가 있나. 하느님이 액션 영화를 만드실 때는 사내들이 얼마나 터프하고 잔인한지를 보여주고,

여자들은 남자들한테 납치당하고 나중에 다른 남자들에 의해 안-납치당하는 여자다운 일을 하는 걸 보여주라고 만드신 거야.


퓨리 로드를 가던 중에 특히 우리 위기에 처한 남성들에게 적대적인, 재앙 같은 장면이 하나 있었어.

총알이 몇 개 남지 않았는데 매드 맥스가 나쁜 놈 자동차를 쏴 버리려고 했지.

매드 맥스가 쐈지만 맞지 않았어. 또 쐈지만 또 못 맞췄지.


그러자 심지어 정중히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퓨리오사가 – 여자라고 말했지? –

맥스의 총을 집어 들어 나쁜 놈 자동차를 쏘고 자동차는 화염과 함께 폭발해버려.


이 장면에서 페미니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x가 떨어지는 줄 알았어.

(우리나라에 여성을 위한 유급 출산휴가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간신히 버텨냈지)


나처럼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없는 남성성의 방패를 가진 게 아니라면 “매드 맥스: 분노의 질주”를 보고

극장을 나선 후에는 아마 메니니스트답지 않은 행동,

예를 들면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는 등의 행동을 하고 싶어 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모든 남성 권리 옹호자들에게 이렇게 위험한 새 영화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라고 강력한 추천을 날리고 싶네.

음, 그보다는 항상 집안에만 있는 게 좋겠어. 그리고 집안에 처박혀 있는 동안 바깥세상과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중지하도록 해.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아주, 아주 조용히 있으라고. 아니면 여성화되어버릴 테니까.


바깥으로 나와도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내가 알려줄게.

약속하지.


원문 출처: https://www.chicagotribune.com/opinion/commentary/ct-mad-max-feminist-20150518-story.html


번역 출처: https://nomanstime.tumblr.com/post/119294929228/시카고-트리뷴-매드-맥스-영화는-페미니스트의-속임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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