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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ris Nov 14. 2019

[밤은 짧아] 상징으로 가득한 긍정소녀의 밤마실 로맨스

존재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 당신의 '검은 머리 아가씨'



'유아사 마사아키가 대체 누구지?'


영화를 시작할 때, 감독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스쳐가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유아사 마사아키의 이름은 확실하게 각인되었다. 아, 미친 천재가 나타났구나. 일본에서는 이미 '포스트 곤 사토시'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미안했다. 몰라뵈서.


변명 거리는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에서 독립영화 수준의 관객수로 모두 흥행에 참패했다. 극장 관람객 만명은 커녕 7000명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건대, 이 영화를 본다고 해도 마음에 들어할 사람들은 극히 적을 것이다. 취향을 좀 많이 타는 영화라서. 하지만 당신이 '데이비드 핀처'보다는 '폴 토마스 앤더슨'을, '봉준호'보다는 '박찬욱' 감독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 영화가 당신의 '최애'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유아사 감독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이하 밤은 짧아)를 통해 아니메 장르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극대화시켰다. 스토리는 논리적인 흐름을 거부하고 모든 것은 과장된다. 여기에 비현실적인 색채까지. 아무리 뛰어난 조명감독과 촬영감독, 각본가를 기용한다고 해도 실사영화에서는 이런 표현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내가 잘못 생각했다. 미셸 공드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출처: 수면의 과학


이렇게 장르에 잔뜩 취해버린 '밤은 짧아'를 보는 관객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음악과 진행에 몸을 맡기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몽환을 즐기는 것. 다른 하나는 기호와 상징과 대사에 집중하며 영화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즐겁겠지만 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두 가지 모두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이 영화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1. 아가씨 vs 이백


영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주인공 '검은 머리 아가씨'와 사채업자 '이백'의 대립이다.

이백은 사채를 빌려주고 변태 아저씨 '도도'에게서 춘화를 빼앗아 가려 하지만, 춘화는 토사물로 더럽혀져 상품성이 떨어진 상태. '도도'를 끌고 가려는 '이백'에게 '검은 머리 아가씨'가 술로 도전하겠다며 1:1 대작을 신청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끝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작화가 정말 미친 듯이 사랑스럽다.  출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이백과 아가씨는 '모조 전기 브랜디'라는 술을 연거푸 들이키며 술 대결을 한다.

그런데 이들의 술맛 표현이 꽤나 상반된다.


출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출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검은 머리 아가씨'는 긍정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녀는 괴기스러운 '궤변춤'을 추는 사람들 앞에서도 긍정적이고, 노인들의 지루한 술자리에서도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녀에게 술이라는 '경험'은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백'은 다르다. 이미 다 아는 맛이고, 경험은 그에게 무의미하다. 모조 전기 브랜디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그는 인생이 무상하다고 느낀다.


인생이 무상하니 찾아오는 '감기'라는 외로움  출처: 밤은 짧아


철저하게 만화적인 상상력. 출처: 밤은 짧아


긍정과 부정의 또 다른 대결은 마지막 에피소드 '감기 폭풍'에서 펼쳐진다. 부정적이고 삐딱한 노인네, '이백'은 우울이라는 감기에 빠지고, 그 감기는 전 교토시에 퍼진다. 하지만 긍정의 화신 '검은 머리 아가씨'는 자신의 긍정과 위로를 통해 사람들의 우울을 치료해 나간다.



#2. 우울이란 무엇일까?


'감기'에 우울이라는 단어를 대입해 봤을 때, 영화의 대사는 한층 더 무게를 가진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운 좋은) 사람들은 우울의 이유가 뭔가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듣기만 해도 미칠 거 같은 최악의 불행이 닥쳐야 우울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은 경우(이유가 생각보다 사소하다면) 그 정도 고난도 이겨내지 못한 나약한 사람인 듯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출처: 밤은 짧아


바보는 존재의 우울함을 생각해 볼 틈이 없기 때문에 감기에 걸릴 일도 없다.  출처: 밤은 짧아


히구치와 하누키의 대화를 들어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우울은 정신이 나약해 걸리는 가벼운 질병이 아니라는 것. (결국 히구치도 감기에 걸린다) 물론, '검은 머리 아가씨'처럼 긍정 파워로 무장해 면역력이 아주 높은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잠재적으로 우울을 겪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감기 폭풍은 영화에서 가장 외로운 두 사람 이백과 선배에게서 시작된다.

돈으로 힘과 사랑과 관계를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이백은 진짜 관계의 부재를 느끼고 감기에 걸린다.


선배도 외롭기는 마찬가지.  출처: 밤은 짧아


선배도 마찬가지. 감기 기운이 돌기 시작할 무렵 아프다는 글을 슬쩍 올려봤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누군가 대답이라도 해주었으면 한결 나았을 텐데.



#3. 우울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방법은


지독한 감기에 걸린 사람은, 병원에 가야 한다. 내버려 두면 열이 오르고 폐렴이 되어 사람을 죽인다.

하지만 병원이라고 해도 깊은 우울을 치료할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존재의 외로움이니까. 존재의 외로움을 치료하는 약은 없다.

외로움의 궁극적 치료 방법은 '사람의 진심 어린 관심' 혹은 '사랑'일 수밖에.


선배는 감기 폭풍을 일으켜 다가오는 아가씨를 밀어낸다.  출처: 밤은 짧아



우울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 보려고 해도,

그 사람은 또 상처 받을 것이 두려워서 더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면서.



아가씨를 괴롭히는 선배의 삐뚤어진 마음. 출처: 밤은 짧아



그냥 밀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괴로운 마음에 만들어진

삐딱한 마음으로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애정을 가지고 우울한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

다가가려 했던 사람도 상처를 받고 돌아설 수 있는 괴로운 과정이다.



언제까지고 당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따윈 세상에 없다. 출처: 밤은 짧아



우울은 전염될 수 있다. 감기가 그런 것처럼.

사랑한다면 아가씨처럼 용감하게 다가서야 하고, 사랑한다면 아가씨가 너무 지쳐버리기 전에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타이밍. 기회를 놓쳐버리지 마시길.


겨우 1시간 30분짜리 영화에, 메시지가 너무 가득 차 있다.

진짜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간 후 시작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훌륭한 영화.


이런 영화,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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