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 수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ris Nov 15. 2019

[소스코드] 너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어

벤담의 공리주의 vs 칸트의 도덕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 가 공개되었을 때, 그 결말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긴 영화 끝에 붙여진 20분의 사족이고, 결말 파트만 깔끔하게 떼어 내었으면 더 위대한 영화가 되었을 거라고. 스탠리 큐브릭이 마무리까지 지었다면 이렇게 ‘질질 끌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평가에 대해 ‘결말이 영화의 단점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장점만으로 만들 수 없었던 완전성을 단점으로 완성시켰다고.


소스코드의 결말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삐- 하는 음과 함께 영화가 마무리되었다면 더 깊은 여운이 남았을 텐데 감독이 너무 친절한 결말을 준비했다는 것. 하지만 감독은 그들을 위해 처음부터 ‘평행우주론’을 준비해 놓았다. 약간의 설정 오류(처럼 보이는 것)가 있긴 하지만 감독은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집착보다는 고생한 질렌할에게 행복한 결말을 선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소스코드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으로 기억되는 그는, 경험에 의한 지식은 무의미하고 추론을 통해서만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발생한 개념이 ‘통속의 뇌’라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팔과 다리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통속에 담긴 뇌’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과연 인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다. 뇌에 전선을 꽂고 현실의 삶과 똑같이 프로그래밍된 전기 자극을 전송하면 현실은 실존과 별로 관계가 없어지지 않을까? 데카르트에게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생각뿐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한 것.



2020년대에 '통속의 뇌'를 실현 가능하다고, IBM이 밝혔다. 그런데 오감 모델링은 어찌하려고? 출처: 사이코패스



이러한 사고 실험은 흥미로운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많은 영화인들이 데카르트의 철학을 활용하여 나름의 해석들을 내놓았다. ‘공각기동대’는 기억, 경험, 체험과 실존을 분리했고, 이후 공각기동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매트릭스’, ‘13층’등의 영화도 불교철학이나 순환논리 등을 결합하며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소스코드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기차에서 잠이 깬 스티븐슨 대위는 영문도 모른 채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의 임무는 기차가 폭발하기 8분 전으로 돌아가 폭탄과 범인을 찾아내는 것. 8분이 지날 때마다 그는 폭발로 사망을 경험하게 되고, 조종실에서는 굿윈 대위가 범인을 찾아내라고 다그치다가 기차로 돌려보낸다. 그는 최근 관계가 소원했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만 굿윈 대위는 ‘임무에만 집중하라’고 말을 돌린다. 임무가 끝나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다고. 지금 범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수백만 명이 폭탄 테러로 죽을 수 있다고. 스티븐슨 대위는 임무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까?


8분마다 죽는다. 죽음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난 죽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데. 출처: 소스코드


결과부터 말하자면 답은 ‘아니’다. 스티븐슨 대위는 이미 죽어있다. 뇌의 일부만 여전히 동작하는 사망자. 이 시뮬레이션은 럿리지 박사가 극비리에 완성한 대테러 프로젝트 ‘소스코드’로, 사망한 승객들 중 한 명의 뇌에 ‘대화가 가능한’ 뇌를 접속시켜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려는 것이다. 죽음을 끝없이 경험해야 하는 이런 프로젝트에 살아있는 인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히 윤리적으로 금지되어 있을 터. 굿윈 대위와 럿리지 박사는 살 가망이 없는 스티븐슨 대위의 뇌를 이용해 테러를 막을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이 공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스티븐슨 대위의 머릿속 환상이다. 출처: 소스코드


영화에서 굿윈 대위를 비추는 카메라는 항상 대각선으로, 굿윈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딱 한번, 그 카메라가 정면을 (관객을) 바라보는 장면이 등장한다. 감독은 굿윈이 아니라 관객들에게 질문하려 한다. 수백만 명을 살리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한 사람의 존엄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마이클 샌댈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가장 중하게 다루고 있는 두 가지의 개념이기도 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입각하면 럿리지 박사와 굿윈 대위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스티븐슨 대위의 인권을 생각할지, 200만의 소중한 생명, (그중에 아직 대피하지 못한 자신의 가족이라도 있다면!) 숫자 계산으로 한다면 한 사람의 희생쯤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스티븐슨과 함께 영화를 보아온 관객은 그에게 당연히도 측은지심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허구에 갇혀 기억도 하지 못한 채 생을 반복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았던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할 기본권이 존재하고, 생명과 존엄은 거래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라 스티븐슨 대위는 해방되어야 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이게 마지막이었다면 명작으로 남았을 텐데' 했던 장면. 출처: 소스코드


감독은 찝찝한 결말 대신, 갑자기 내려온 해피엔딩을 스티븐슨에게 선물한다. 사실 영화와 같은 결말을 내기 위해서는 감독이 영화 내내 애써 부정했던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인정해야 하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평행우주’라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 것 같지만 뭐 어떤가.


영화가 꼭 예술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좋은 시간을 즐기게 해 주고,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스필버그가 그랬던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친절한 금자씨] 금자씨의 폭력에 주어진 정당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