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영어가 작심삼일이 되는 것은, 당신의 관점 때문이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강남의 모 프리미엄 어학원에서 1:1 맞춤형 OPIc 강사를 하던 사람입니다. 당연히, 어떻게 하면 IH를 획득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AL을 획득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죠. OPIc을 주관하는 ACTFL의 Rater들은 '가짜 영어실력'을 판별하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하고 있고, 그래서 오픽 AL은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증명의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학원이 수도 없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유혹합니다. 야, 너두 오픽 AL 받을 수 있어. 그 세상에서 수익을 취하던 강사였지만, 참으로 회의감이 큽니다. 분명 고객의 니즈에 맞춰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는 한데, 그게 영어를 배우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이 가르쳐주는 것은 영어를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들리게끔 하는 것입니다. 오픽의 Rater가 평가하는 방식을 분석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그들을 속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게 통하냐구요? 제 수강생들의 수많은 합격 인증을 보면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들은 원하던 성적을 손에 쥐었지만, 그래서 너무나 기쁘고 다시는 영어를 '쳐다보지도'않아도 되는 자격을 획득했지만 그 사실이 너무 슬프다는 겁니다. 우리가 영어를 '시험받아야'한다는 현실이, 우리가 영어를 혐오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영어요? 사실 안 배워도 돼요. 그러나 최근에 제가 감명 깊게 읽은 포스팅에서, 저는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식의 확장은 삶의 해상력을 높인다
해상력이라니. 재미있죠? 지식이 확장되면 흐릿했던 세상이 조금 더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내가 모르고 있었을 때는 와인이 거기서 거기였지만, 내가 와인을 조금 더 알게 되는 순간 그 사소한 차이들이 느껴지고요, 내가 요리를 조금 더 알게 되면 맛집의 비밀들이 조금씩 보입니다. 영화의 표현 기법을 이해하면 영화 속에 감독들이 숨겨놓은 소오오름 끼치는 메세지까지 느낄 수 있어요. 물론 그런 것들이 없어도 '명작'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내가 왜 영화의 그 장면을 보면서 그렇게 기이한 감동을 느꼈는지 이해하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해상력이 좋아진 거예요.
그런데, 사실 다른 그 어떤 배움보다도 삶의 해상력을 확실히 높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언어'입니다. 영어가 편안해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번역이 없는 컨텐츠에 '쫄지' 않아도 되고,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팝송의 가사와 영화의 농담들이 들리기 시작해요. 또 구글링으로 필요한 어떤 정보라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한글은 뛰어난 문자이지만 국문으로 된 정보 생산량은 영어 정보 생산량의 1/1000도 미치지 못합니다. 영어를 모르면 우리는 항상 한 단계 뒤쳐져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런 많은 부분들을 놓치면서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정도로만 영어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학원도 옆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죠. 이것만 획득하면 너는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될 거야. 정말로 그렇나요? 글쎄요. 영어를 필요로 하는 업무에는 이미 넘칠 만큼 많은 영어 능력자들이 있는걸요.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도 출발하지 않은, 영미권에서 십수 년 유학을 하고 돌아온 이들이요.
저는 영어를 '잘하는'게 목표인 것이 참 싫습니다. 영어는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창구이고,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게 만드는 매개이자 수단입니다. 내 영어가 조금 어눌하면 어때요. 내가 외국인도 아닌데 그걸 왜 평가받아야 해요. 그런데 사회는 계속 영어를 평가하라고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달랐졌으면 좋겠습니다. 외국인과 사귀고 한국과 다른 문화를 느껴보고 싶어서. 자막 없이 '데드풀'의 인사이드 조크에 낄낄거리고 싶어서. 헤밍웨이의 선이 굵고 힘찬 문체의 감동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어서. 얼마나 좋습니까.
문화를 즐기면 영어는 그대로 다가옵니다. 다행히 영미권의 문화는 엄청나게 흥미로운 것들이 많습니다. 마블과 디즈니,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의 영화산업을 비롯하여 게임, 음악, 브로드웨이로 대표되는 뮤지컬, 그리고 영문학까지. 다만, 이런 컨텐츠들은 '번역'이 너무나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배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화'와 '만남', '소통'을 위한 영어라면 어떨까요.
저는 가끔씩, 영어가 하고 싶어서 미치겠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갬성'이 거기에 있거든요. 가끔은 술 먹고 헛소리를 지껄이던 대학교 시절이 그리워서요. 한국어로는 그게 잘 안되더랍니다. 한국어를 하는 '이수민'이라는 사람은 조용하고 차분한, 책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영어를 하는 'Chris'는 그보다 훨씬 더 활발하고 격정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막상 영어를 쓰려고 하면, 기회가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데 내 주위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영어 스터디를 참가해 봅니다. 하지만 영어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레벨에 맞는 English speaking community를 찾는 게 너무 어려워요.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은 어딘가에 충분히 있겠지만 일면식도 없는 그들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 만으로 먼저 다가가 선뜻 말을 건네는 것도 그렇게 내키지는 않습니다.
몇 번쯤, 영어 커뮤니티에 참여해보고 실망해서 돌아섭니다. 나도 즐기고 싶어 갔는데 내가 사람들 영어를 가르쳐줘야 하는 상황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잖아요. 답답하기도 하고.
사실 인식을 바꾼다는 것은, 많은 스타트업이 도전하는 것이지만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잠언처럼 내려오는 말이 있죠. '소비자를 거스르는 브랜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미 만들어진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험 성적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게 하는' 학원들이 그렇게 많은 거죠. 니즈를 바탕으로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은 굉장히 Promising 해 보입니다.
우리는 소비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어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야. 영어는 공부하는 게 아니야.'라는 메세지를 먼저 납득을 시켜야 합니다. 웬만하면 시도하지 않는 게 좋아요. 소비자들은 대체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 니즈는 확실하다니까?' 라고 답할테니까요.
하지만 Needs가 아니라 Want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하며 브랜드를 찾게 된다면요. 물론 그렇게 하려면 확고한 미션과 비전, 고객 경험을 위한 노력과 노하우,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과 실행력이 있어야 하겠죠.
요즘, Y사나 R사, S사 등을 통해서 '온라인 영어강의' 같은 것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컨텐츠가 좋냐고, 영어 강사의 입장에서 물어보신다면 저는 '좋다'라고 항상 말을 합니다. 진짜 좋아요. 특히 개인적으로는 R사의 교육 컨텐츠를 저는 제일 좋아합니다. (머리가 조금 벗겨진 똑똑한 외국인 형이 나오는...)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컨텐츠가 아니라 본인이 그것을 구매하는 목적입니다. 제 지인 중 하나는, 100만원을 내고 그것을 결제한 후에 첫 두어 달을 불태웠어요. 사실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미션을 몇 개월간 수행하면 전액 환불을 해준다는 조건 때문에 기계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하루, 그 지인이 깜박 미션을 빼먹고 실패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 지인은 단 한 번도 R사의 컨텐츠를 청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런 경험을 한 것이 제 지인만은 아니겠지요.
목적이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내가 의지박약이고 못나서 그렇게 영어를 정복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같은 맥락에서, 저는 취업을 위해 한국사 자격증과 컴활, 그리고 기타 자격증 등등을 공부해야 하는 이 사회가 참 안타깝습니다.
해상력을 높이고 싶지 않다면, 대한민국의 사회 안에서 충분히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면 외국어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요. 영어를 욕망하지 않는데, 사회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초단기 등급 획득 비결을 찾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등급을 나누고 평가하려고 하는 사회가 잘못한 거죠.
다만 '진짜'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우리의 관점을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나의 공부가 허망한 이력서의 한 줄이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