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감독 노아 바움백, 이혼을 말하다
얼마 전, 결혼을 준비 중이라는 한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커플이어서 깜짝 놀랐죠. 축하한다고 덕담을 건네려 하는데 이 분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결혼이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아. 준비하면서 느낀 건데, 결혼은 현실이구나 싶더라."
식장을 잡는 것부터 양가의 신경전이 시작되어서 예물, 예단, 예복까지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뭐, 여기까지는 자주 들어왔던 문제점들이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인의 가족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갑니다.
"혼인 신고 전에 재산을 부모님한테 맡기고 가래. 나중에 만약에라도 이혼하게 되면 재산 분할에 불리해진다고. 요즘은 다들 그런다네?"
연애에서도 좋은 이별은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혼은 어떻겠습니까. 연인 사이에서야 주고받은 정이 아쉬운 정도겠지만 이혼은 재산 분할과 양육권, 양육비까지 정말 '억'소리 나는 전쟁인데요.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헤어지더라도 원수로 남지는 말자 하는 커플도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법정에 몇 번 들러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질 겁니다. 서로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실망한 상태에서 남의 사정 따위 보이지도 않을 거고요.
오늘의 영화 <결혼 이야기>는 제목과는 다르게 사실은 이혼 이야기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져 결혼한 커플이 이혼을 통해 죽일 듯이 미워지는 과정을 담고 있어요. 결혼하고 나서 보면 너무 늦으니까, 미리미리 봐 두세요. 이런 영화, 세상에 또 없습니다.
<결혼 이야기>의 감독, 노아 바움백은 성별의 균형을 참 잘 잡는 감독입니다. 이 영화는 남녀 양쪽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삐끗하면 한쪽의 이야기만 공감하게 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면 상대방의 입장도 조금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좋은 대사, 좋은 연출, 좋은 음악이 너무 잘 짜인 영화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여러 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지만, 특히 세 장면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아, 스포일러는 존재하지만 알고 봐도 영화의 재미에 큰 영향은 주지 않아요. n차 관람이 더 재미있는 영화거든요. 하지만 리뷰를 이해하려면 영화를 보고 오시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애덤 드라이버), 두 사람은 변호사 없이 이혼을 진행하고 싶어 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해 법정에 가게 되면 돈이 많이 드는 추잡한 싸움이 될 테니까요.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고, 원만한 합의에 의해 이혼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결국 니콜은 주변 사람들의 강요에 못 이겨 이혼 전문 변호사 노라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전환점이죠. 노라는 니콜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는 아주 평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니콜은 눈시울을 붉히죠. 이혼을 하는데 멀쩡하게 잘 지낼 리가 없잖아요.
노라는 자신의 이혼 경험을 이야기하며, 남자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엉망인지 이야기합니다. 니콜은 반사적으로 "아니에요, 찰리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변호사 없이 이혼을 진행하고 싶어요."라고 찰리를 옹호합니다.
하지만 노라는 그 대화에서 틈을 찾았는지, 자신의 하이힐까지 벗고 니콜에게 다가가 앉습니다. 영화에서 신발은 보통 정체성을 의미하죠. 높은 힐은 노라의 유니폼이고 변호사로서의 정체성이에요. 남자들과 같은 눈높이에 설 수 있는 그녀의 무기입니다. 그 힐을 벗고 니콜에게 다가간 노라는 변호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친구로서 주의 깊게 니콜의 이야기를 들어 볼 생각입니다. 여자들이 노라를 좋아하고, 그녀가 인생을 구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노라의 이런 능력 덕분이죠.
니콜은 그런 노라에게 홀린 듯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습니다. 아주 어릴 적, 자신의 첫 결혼부터 시작해서 찰리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성공적인 배우였던 자신이 어떻게 찰리의 그늘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는지.
찰리는 극단을 지휘하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스타였던 니콜은 찰리의 극단에 들어가며 점점 사그라듭니다. 그러다 아이를 가지게 되었죠. 물론 찰리는 아이를 가진 것을 기뻐했지만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니콜을 서운하게 합니다. 결국 여기서도 찰리는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주위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침대며 가구며 온갖 물건들이 남편의 취향으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니콜은 항상 LA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찰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죠. (이 장면에서 감독은 열변을 토하는 니콜을 향해 서서히 줌 인을 합니다. 붉어진 눈으로 울먹거리는 니콜이 화면에 가득 찰 때까지. 이 느낌은 영화를 꼭 봐야지만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들의 삶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찰리의 행복은 니콜과 헨리의 행복을 일정량 희생해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찰리의 생각이었고, 이게 니콜에게 세뇌가 된 거예요. 노라에게 다 털어놓고 나니 이제 문제는 명확해졌습니다. 하지만 니콜은 남편하고 마주할 용기가 없어요.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남편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대신 변호사를 선임합니다. 불편하고 껄끄러운 이야기들은 변호사들을 통해서 하자고, 반복적으로 이야기해요.
남자 관객이라면 그래도 찰리의 편에 설 수도 있어요. 그래도 찰리는 다정하고 꽤 괜찮은 남자처럼 보이는데, 니콜의 가족들도 모두 찰리를 좋아하는데 꼭 그렇게 이혼이라는, 변호사 선임이라는 강수를 뒀어야 했냐고. (저도 첫 감상의 느낌은 그랬거든요...) 그런데 3회 차 관람이 되어서야 니콜이 보였어요. 아, 이게 모든 기혼 여성들이 호소하는 외로움이라는 녀석이구나. 두려움이라는 것이구나.
<82년생 김지영>이 얼핏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대현(공유)은 분명 '그만 하면 괜찮은 남편이지. 현실에 저런 남편이 어딨어?'라고 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부족한 그 모습. 찰리도 꼭 그 정도였습니다. 그리니 이혼을 통하지 않고서는, 변호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 과정이 없다면 찰리는 평생 자신의 외로움을 느끼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합니다. 만약, 니콜이 용기를 냈다면, 변호사 뒤에 숨는 대신 찰리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내 말을 모조리 씹어왔지만 난 LA에 살고 싶어. 지금까지 당신에게 맞춰서 살아왔잖아. 헨리도 이 곳이 더 좋다고 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더 좋은 환경은 뉴욕이 아니라 LA야.'라고 말했다면, 음. 어땠을까요? 어떤 결과물이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부딪혀 볼 만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바로 이어지는 장면, 니콜이 LA집에서 찰리에게 이혼 소송을 정식으로 알려주는 장면도 아주 훌륭합니다. 니콜은 이혼을 하겠다 하는데 가족들은 소송을 취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니콜을 말리거든요. 이게 '괜찮은 남자들'의 문제점입니다. 내 편은 아니고 항상 남의 편이라, 같이 살 때는 복장이 터지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좋아해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면 '아이고 시상에, 니 남편만 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러냐, 복에 겨운 줄 알아 이것아!'가 나오는 거죠. 아예 모두가 인정한 x 놈이라면 화를 풀어놓을 데라도 있지. 엄마는 한술 더 떠서 '찰리와 나의 돈독한 관계는 네 결혼이랑 별개야'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때 찰리가 도착합니다. 엄마와 언니는 얼른 방으로 도망치죠. 문을 열고 만난 니콜과 찰리는 가볍게 키스를 하고 (이혼 소송 중에요?) 주방으로 들어옵니다. 찰리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군요. 연극에 주는 권위 있는 상인 '맥아더 상'을 수상하게 되었답니다. 니콜은 진심으로 놀라고 기뻐하지만, 찰리가 무덤덤하게 "나 배고파"라고 말하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릅니다. 저렇게 무심하게 얘기해도 되는 건가? 말로는 '우리가 함께 타낸 상이야'라고 말하지만 그건 의례적인 거고, 진짜 니콜에게 고마워하는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다.
찰리의 머릿속에는 니콜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겁니다. 지금 찰리의 머릿속에는 나와 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일터인 극단밖에 없습니다. 그걸 눈치챈 니콜은 얼마나 기분 나쁠까요? 잠시나마 당신과 키스를 하고 안아주면서 예전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집니다.
찰리에게 이혼 소송서류를 넘겨준 후에도 찰리는 '우리 변호사 없이 이혼하기로 했잖아. 일단 너 촬영 끝내고 뉴욕에 돌아와 이야기하자'라고 합니다. 찰리는 심지어 이혼을 한 뒤 니콜의 거취도 자기 맘대로 정해버린 거예요. 아들인 헨리가 왔다 갔다 하며 살 수 있게 가까운 곳에 집을 얻자고. 니콜은 사실 여기까지 내다본 겁니다. 자신이 LA에서 살고 싶다면, 그리고 헨리를 저 무심한 아빠의 손에 맡겨 놓지 않으려면 반드시 소송이 필요하다는 것을.
찰리가 생각했을 때는 어이가 없었을 겁니다. 우리끼리 얘기하기로 했잖아? 어떻게 날 이렇게 엿 먹일 수가 있지? 심지어 자신은 니콜을 생각해준다고 '거친 변호사' 대신 '사람 냄새나는 변호사'를 선임했는데요. 난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하지만 니콜의 입장에서 보면 대화의 기회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내가 그러니까 LA 가고 싶댔잖아. 이 상황을 노라가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주네요.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면 약속이 되는 거고, 니콜이 원하면 상의가 되는 거예요?"
찰리는 자신의 생각대로 니콜을 조종하면서 이미 대화의 기회를 다 날려 먹었습니다. 남자들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 있어요. 네 생각을 더 명확하게 밝혔어야지! 그렇게 어물쩍 말해놓고 내가 알아듣기를 바란 거야? 아니, 더 명확하게 말했으면 싸웠을 거잖아요. 사랑하는 사이라면 싸우지 않고도 날 배려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알았죠. 그리고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 싸움을 거는 건 무섭기도 할 거고요. (아무리 블랙 위도우라도 190cm의 카일로 렌을 상대하는 것은 좀...)
영화가 이 정도까지 막장으로 흘러갔는데도 감독은 두 사람의 유대를 계속해서 확인합니다. 자기 음식 메뉴도 못 정하는 찰리를 위해 니콜은 찰리의 취향에 맞춰 음식을 주문해주고, 집에 전기가 나갔다는 니콜의 말에 찰리는 한 달음에 그녀에게 뛰어갑니다. 찰리의 덥수룩한 머리가 마음에 걸린 니콜은 '내가 잘라줄게'라며 가위를 들고요.
하지만 진짜 명장면은 찰리가 LA에 임시로 얻은 집에서 나옵니다. 법정에서 제대로 된 결론을 낼 수 없었던 니콜은 찰리를 찾아가요. 이제는 우리가 아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더 이상 법정에서 싸우지 말고 대화로 풀어보자고 합니다. 찰리는 그런 니콜을 비웃죠. '내가 그러니까 변호사 선임하지 말자고 했잖아?'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오만한 표정입니다. 지가 똑똑한 줄 아는 사람들은 이런 말 잘해요. '내가 뭐랬어.'
물론,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았으면 니콜이 헨리를 데리고 LA로 이사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찰리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라는 충격요법이 없었으면 자신이 니콜의 이야기를 들은 척도 안 했을 거란 것은 기억하지 못해요. 그렇게 감정의 폭발로 치닫는 그들은 얼굴을 잔뜩 구기고 서로에게 침을 튀겨대며 욕설을 내뱉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찰리는 니콜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합니다. 미안해. 그리고 니콜은 다가와서 찰리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죠. 나도 미안해.
결혼이 만드는 애증의 관계. 얼마나 슬픈가요. 이 영화가 길이 남을 명작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영화는 가장 감정적으로 폭발할 때도 애달프고, 공학적으로 치고받을 때도 애틋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심오하고 복잡 다단한 감정을 연출로 풀어낼 수 있지? 이런 영화를 보면 감독이 같은 사람으로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대단해요. 아마 저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지구 반대편에 앉아서 리뷰를 두들기는 저도 그를 알 수 있는 거겠죠.
<결혼 이야기>의 남편, 찰리는 조금 불행해졌지만 대신 니콜과 헨리는 조금 더 행복해졌습니다. 자신의 삶을 찾았거든요. 하지만 그들이 조금 더 일찍 이 행복의 원리를 깨달았으면 어땠을까요. 찰리가 LA의 감독직을 받아들였다면. 아니, 사실 LA일 필요도 없어요. 니콜이 뉴욕 때문에 불행했을까요? 찰리가 니콜의 비명을 조금만 일찍 들었다면 그들은 뉴욕에서 다 함께도 행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리뷰 첫머리에, 결혼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시라,라고 말씀드렸지만 결혼 후에도 괜찮습니다. 다만, 한 가지의 다짐을 하고 보셔야 해요. 남성은, 니콜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하고 여성은 찰리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다행히 감독은 좋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에서도 영화는 이해될 수 있어요. 하지만 또 그 균형 때문에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 입장을 고수하게 되기도 하죠. 제가 첫 관람 때 찰리에게 이입했듯 말입니다.
여자 친구와 이 영화를 함께 보고, 여자 친구가 '이 영화 참 우리 같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좀 무심하고, 사업으로 번 돈은 유지하는 것에 다 쏟아 넣고, 고집스러운 면은 있지만 그거 말고 나한테 그렇게 불만이 많아?라고 생각했죠.
'우리 같다'라는 말은 자신이 니콜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여성분들이 <82년생 김지영>을 보고도 느꼈을, 약간의 상황들은 다르지만 참, 우리들 사는 모습 같네 라고 느꼈던 그 부분들.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야겠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