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과 깎는 여자 - 박성민

by 백윤석

그녀는 칼날로 북극 먼저 도려낸다

지구의 기울기인 23.5도로 사과를 눕혀

돌리며 깎아나간다

북반구가 하얘진다


푸른 지구 속살에서 흘러나온 과즙 향기

끊길 듯 이어지며 남극까지 깎이는

청사과 엷은 껍질에

매달린 빌딩들


사과를 기울여 한 바퀴 돌릴 때마다

그녀의 눈동자에 낮과 밤이 지나가고

사랑의 기울기 끝에

빙하가 다 녹는다


박성민,「청사과 깎는 여자」- 전문


박성민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박성민 시인이 발표한 시 중 눈길을 잡아끄는 시가 있어 소개를 해드린다. 일상생활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을 소재로 이런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시인이 얼마나 있을까? 이는 한시도 한눈 팔지 않고 시적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결과에서 비롯된다.


사과를 지구라고 생각한 시인은 사과를 깎는 자체를 지구에 대입한다. 제일 먼저 북극이 깎이는데 초장부터 압권이다. 각 수 종장마다 풀어놓은 선문답 같은 상징도 특색이 있다. 첫수 종장에서는 "북반구가 하얘지"며 둘째수 종장에는 "청사과 엷은 껍질에" 빌딩이 매달리며 세번째 종장에는 "사랑의 기울기 끝에 빙하가 다 녹는다" 라고 단언한다. 혹자는 이를 지구의 난개발까지 거론하면서 오염되고 있는 지구의 실태까지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설을 할 만큼 심오한 깊이가 있는 시라 하겠다.


사과를 깎는 행위는 자신보다는 누구를 위해 깎는 경우가 많으므로 마지막 수 종장은 그런 행위를 통해서 사랑이 완성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또 한 편의 좋은 시를 만들어낸 시인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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