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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Mar 14. 2023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책 <에디톨로지(Editology)>, 김정운 저

한창 김정운 교수의 강연에 빠져 있을 때가 있었다. 시사 콘서트 시리즈, 명작 스캔들, 김정운 특강쇼, 힐링캠프 등 나오는 건 다 챙겨볼 때쯤 이러다 이 교수님의 인생 레퍼토리를 외우는 게 아닐까 싶으면서도 뭔가 방송에서 듣지 못한 새로운 에피소드를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던 때였다. (사실 명작 스캔들은 조영남이 싫었던 것과는 별개로 꽤 흥미롭게 보던 쇼였는데 종영되어서 정말 아쉬웠다.) 여하튼, 그런 맥락 속에서 읽게 된 이 책은 내 인생의 패러다임을 18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90도쯤은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책이다. (개정판이 나왔던데 언젠가 전자책이 아닌 실물 도서를 사서 읽어보고 싶다.)


창조는 편집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서 나만의 것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라는 논지인데, 실제로 이 책을 읽은 후로 나는 더 이상 정보 가치가 있는 기록물은 노트에 수기로 기록하지 않고 무조건 디지털화시켜서 블로그나 삼성 노트에 저장해 둔다. 언제든지 검색해 볼 수 있고, 태그를 통해 형성된 메타데이터로 새로운 맥락을 재창조해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으로 와닿았으니까. 책에서 언급된 대로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 이라는 말을 믿게 된 셈이다. 그게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종합이든 아니면 실제 물리적인 정보의 결합이든 간에.



챕터 2 와 3 이 특히 좀 재미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원근법의 발견으로 인한 서구 합리성 및 객관성의 발달에 따라 공간 심리의 이야기로까지 확장되는 게 흥미로웠다. 전자는 미디어 미학 시간이나 예술사 시간에 배웠던 개념이라면 공간 심리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흥미를 느꼈던 것과는 별개로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았는데, 살아보니 그렇다. 내가 어떤 공간을 설계하고 '나에게 맞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은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이 있다는 거고 그에 상응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소실점에 위치한 권력이 자신의 시야에 아름다운 구도를 보이게 하려고 풍경을 '편집' 하듯 공간은 그 공간을 소유하거나 지배하는 이의 통제권에 있기 마련이다.


공간에 대한 편집이 편집된 개인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장되는 게 재미있었는데, '나' 는 내가 살아온 기억, 내가 살아온 문화권이 편집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는 인생, 얼마나 오래 정상적으로 작동할지 알 수 없는 소모품 같은 내 몸뚱이를 소중하게 여겨서 살아 있는 동안 좋은 걸 많이 읽고 보고 듣게 해 주고픈 욕심이 생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편집을 할 수 있는 나만의 데이터베이스 소스를 많이 비축하고 싶은 욕심과 함께 요약의 중요성 또한 깨닫게 된다. 내가 읽고 처리한 정보를 내 언어로 간결하게 핵심만 정리할 수 있는 능력. 그렇게 데이터를 쌓고 쌓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만의 메타데이터가 형성되어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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