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R May 06. 2024

재현에 대한 재현, 그리고 재현의 윤리

영화 <메이 디셈버(May December)>, 토드 헤인스 감독


재현에 대한 영화, <메이 디셈버>. 영화가 작품 안팎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떤 재현은 그 삶을 실제로 살아낸 사람에게 폭력이 될 수도 거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고전적인 장르 문법을 따르는 오래된 영화를 보는 듯 진행되는 영화는 극에 온전히 집중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듯한 감독의 의도가 곳곳에 깔려 있다. 특히 화면에는 인위적으로 그레인 효과가 덧입혀져 있고 실제로도 영화는 극중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재현의 대상은 어떤 실재하는 부부의 삶이다.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는 이 가족은 남편과 아내의 나이 차가 20살 차이인데 문제는 두 사람의 나이가 각각 13살과 36살일 때 만나기 시작했단 점이다. 영화상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셋인데 아버지와 자녀들의 나이 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단 점에서 기묘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이 가족의 삶은 마을 내에서 아주, 잘, 유지되고 있다. 마치 하나의 진짜 현실처럼.


문제는 진짜는 진짜인데 영화 속 대사처럼 "이상한 진짜" 같단 거다. 극 중 엘리자베스가 "때로는 잘 짜인 안무처럼 기계적으로 내가 언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집중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등장인물 모두는 역할 수행하듯 삶을 산다. 조는 아빠 역할을, 그레이시는 엄마 역할을, 아이들은 자녀 역할을 하면서 마을 내에서 '정상 가족' 의 이미지를 '재현' 해 내려고 애쓴다. 절대 인정은 하지 않지만 아닌 척, 남들 눈을 지독하게 신경 쓰면서.


영화는 형식적으로 이를 드러내기 위해 인물들이 역할수행·연기를 하려 할 때마다 감독이 특유의 배경 음악을 깔아준다. 하지만 극 중 인물들은 자신들이 역할수행을 하고 있단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그레이시는 알지 않았을까? 조는 확실히 몰랐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런 가족을 영화로 담아내려고 엘리자베스가 접근한다. 그는 인물들에 대해 더 많은 구체적인 정보를 모을수록 더 정확한 재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물이고 도덕적 회색지대에 놓인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인물을 연기해 낼수록 희열을 느낀다는 일종의 오만을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레이시가 조와 자녀들에게 보이는 언행, 딸에게 주었다는 선물, 그레이시가 대외적으로 하는 일, 그레이시가 조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서 그레이시가 얼마나 지독한 통제광이자 불안정하며 동시에 가스라이팅을 잘하는지 보여준다. 그런 그레이시에게 24년의 인생을 저당 잡힌 조는 진짜 자신은 지운 채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재현해 내기에만 급급해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들을 보살피며 살아야 했던 조에게는 돌봐줄 사람도 공감적 지지대를 형성해 줄 사람도 없었다. 그레이시는 이 점을 알고 약점을 파고들어 가스라이팅으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상처받은 상대를 보듬는 모습' 이 크게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조가 그레이시를 달래주는 모습, 조의 아들이 조를 달래주는 모습이다. 즉 가스라이팅 피해자가 가해자를 보듬고, 아들이 아버지를 보듬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역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특히나 전자는 매번 일방적으로 그레이시가 조에게 공감과 위로를 요구한다. 영화 속 조는 어린 아들에게 처음 대마를 배운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박탈당한 졸업식이라는 경험을 누가 그은 줄도 모를 철장 밖에서 지켜본다. 아이들은 졸업식과 함께 성년이 되어 집 밖으로 나가는데 조는 그 어떤 성장의 기회도 차단된 채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24년을 흘려보낸다.


"This isn't a story, this is my fucking life!"


엘리자베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미를 위해 재현해 낼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조에게는 흘러간 24년이 진짜 인생이었던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영화를 보고 계속 생각나서 뉴요커 리뷰와 실제 부부 영상을 몇 개 더 봤는데 충격이 가중되었다. 본인들이 자기들 이야기를 계속해서 셀링했었다는 것도 놀랍고 "Who was the boss?" 라는 대사가 실제 인물의 말에서 인용됐다는 점에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을 실제 음성으로 들었을 때 기분이 묘했다.

영화에서 조가 나비 애벌레를 키우는데 조는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아주 섬세하게 보살핀다. 왜냐하면 그 틀 안에 갇힌 애벌레가 본인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그레이시는 애벌레들을 단순히 치워 없애야 할 벌레로만 취급한다.


동시에 그레이시는 아주 지독하게 정상 가족 재현이라는 현상 유지를 지속하면서 과거를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두 점에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구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현상 유지에 전념하고 있는 듯하다. 노예제가 담고 있는 도덕성의 문제라든가, 체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등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세상 속에 존재하며 보이는 것만 기록했을 뿐이다. [...] 그가 성생활에서 쾌락을 느꼈다는 명백한 사실 외에도 주목할 점은 상대를 통제하기가 손쉽고 편리했다는 것이다. [...]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강간이라고 부르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주인의 권리' 라고 표현했다.

<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저


실제로 영화가 재현한 르투아노라는 여성은 부유한 극우 정치인의 딸, 푸알라우라는 남성은 워킹클래스 가정의 사모아족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게 인종적+계급적 착취가 미성년자 강간이라는 형태로 드러난 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의문이 든다. 더불어 찾아볼수록 그 당시 푸알라우 씨가 그 상황에 부닥쳤을 때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법조차도 그 사람을 제대로 보호하고 돌봐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러니 혼란스러운 와중에 다시 르투아노 씨에게로 돌아간 게 아닌가.



영화 <메이 디셈버> 는 평론가의 찬사를 얻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런 식의 인종, 계급 등이 복합 착취적인 그루밍 관계를 수면 위로 계속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동시에 실존 인물의 삶에 대한 가치판단을 종용한단 점에서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푸알라우 씨의 삶 → 푸알라우 씨의 삶을 재현한 조의 삶 → 조의 삶을 재현하려는 엘리자베스 →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는 화면 밖의 나 → 다시 푸알라우 씨의 삶.. 영화적 재현과 언론매체의 재현, 그리고 현실이라는 삼각구도의 딜레마 속에서 어지러울 따름이다.




INSTAGRAM @hppvlt

https://instagram.com/hppvlt/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이 야만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