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R Jun 10. 2024

연인戀人, 단상 #7

2023. 10. 18.


길채 이마에 흉터가 진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을 것이다.

스스로 꽃으로 남기보다는 생에 의지의 흔적이기 때문에.


흙으로 빚은 떡에서 메밀맛이 난다는 걸 아는 유일한 인물이란 점에서 량음이가 살아온 세월이 어땠을까 단박에 스치는.


이 드라마 '경계' 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고 량음이는 태생부터 경계 밖에 있던 존재이기에 조선 사회가 이상적 사회가 되려면 량음과 같은 존재도 경계 안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더불어 그 규범으로써의 경계가 허울일 뿐이고 국가 존속의 위기를 초래한 전쟁으로 인해 그 허울적 면모가 더 두드러졌다 생각한다.


이제는 "꿈 속 낭군" 도 없다는 걸 깨닫는 연속이 곧 길채의 성장인 것 같아.


"연준과 량음이 함께한 씬으로 인해 우리는 량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음. 연준을 먹과 종이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의 세계로 안내한 것이 량음이라는 것은, 량음이 그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 작가가 그리고 싶은 그 세계. 이장현은 포로를 딱하게 여길지언정 현실적 판단 하에 그들을 도우는 행동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의 등을 민 것이 량음이의 울상인 표정이었다는 것. 량음이는 그 때도 이장현을 자기가 사는 '사람의 세계'로 안내한 것이다. 매국노가 되면 그 세계에서 멀어져버리는데 돌려보내준 것이 량음이다."


먹의 세계에서,

진짜 백성이 발 딛고 사는 흙의 세계로.



2023. 10. 19.


기분이 묘한 게 사극인데도 외국인들도 길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그 길을 응원하는데 한국어를 모국어로써 이해한다는 사람들이 길채를 이해 못하고 욕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감. 솔직히 언어가 문제겠어. 영상 매체인데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의 문제지.


작품 맥락 속에서 그 시대 사는 사람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데 2023년을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대로 보다가 기대치 충족 안 되니까 화 내는 거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음. 물론 2023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17세기 성리학 사회를 사는 여캐를 이해한다는 게 쉽진 않을 거란 생각은 들어. 그러나 드라마에서 그 여캐를 옥죄는 규범 족쇄들을 다 설명해주잖아. 촌스럽다 해도 아주 친절하게 대사로까지 오조오억번 염불을 외우는 수준인데.



2023. 10. 20.


길채가 원손을 살리는 시퀀스 전체가 좀 묘했다. 이런 말 하면 욕 먹을지 모르겠지만 원손은 말이 원손이지 누군가의 보살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나한테는) 다소 돌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됐는데, 왕족 씨인 원손 하나 살리겠다고 다른 모든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게 당연한 순간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원손이 조선의 미래" 라는 말로 정당화되었던 많은 이들의 죽음이 너무 슬펐다. 조선의 미래는 배에 차마 타지 못했던 이들이 살아남았을 때 다시 발 딛고 서서 이룰 사회였을 텐데.


의리는, 명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 백성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함을.


저 시기 장철을 비롯한 사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집단인지 정확히 몰라서 "우리는 난세를 근심하던 성현들의 가르침, 그 <근본> 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서 근본이 뭘 지칭하는지 불안하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사람을 아시오...


살기 위해 내달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함께 살았으면 하는 사람이 눈에 밟혀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길채가 자꾸 떠오른다. 물론 길채는 그곳에 발이 묶이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여성의 더럽혀진 몸은 부모님께, 남편에게, 나라에게 죄가 된다. 설령 더럽혀지지 않고 지켜진다 한들 '최상품' 이 되는 게 현실이다. 고운 피부를 비롯한 조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그 모든 것이 '값' 으로 쳐지는 거 보고 진짜 할 말 잃게 된다.


내가 살고 싶다는데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야.
난 살아서 좋았어.
내가 지켜줄게.

/ 유길채, <연인>


드라마를 보면서 내내 병자호란이 배경이라 해서 마냥 국수주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단 생각을 했는데, 지배국 황실의 여성이라 해도 결국 가부장적 제국의 확장에 있어서의 정략결혼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는 걸 보여준다는 게 인상적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부인은 이미 절개를 잃었을 터인데 속환해 무엇합니까? 부인은 다시 구하면 되는데."


여성을 인간이 아닌 '절개' 라는 가치를 가진 그 무언가로 보는 극중 남성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라고, 그의 선택을 믿고 보내준 건데, 그 사람이 내 눈 앞에서 밑바닥의 밑바닥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였으니 눈 돌아갈 만하지.


원무 이 새끼는 무관이면 뭐하나? 기껏 심양에 가놓고 아내가 '정절' 을 잃었다는 소리에 눈 돌아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오다니. 무능한 원무 대신 은애가 길채를 살린다 해도 납득할 것 같다. 그런데 정절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 눈으로 확인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망령에 씌어서 믿고 싶은대로, 보고 싶은대로 보는구나.


극중에서 이장현과 남연준을 제외하고, 조선 여성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가부장이 없다는 게 탄식스럽다. 그냥 딱 그 시대의 시대정신 같달까. 여자를 절개라는 가치를 가진, 자신의 핏줄을 이어줄 도구에 불과한 존재로 보는.



2023. 10. 21.


구원무 이 새끼는 그냥 <꽃> 같던 유길채가 <갖고> 싶었던 거지, 인간 유길채를 사랑할 마음은 없었음을.


원무가 가지고 있는 돈도 길채가 불려준 건데. 그걸 핏줄 타령 아들 타령하는 놈한테 주고 오다니. 그간 길채가 불려준 돈을 길채 목숨값 살리는데만 썼어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연준이었다면 멱살 잡았을 텐데, 아쉽다.


장현이가 각화에게 잡혀 있으면서 길채가 짐승만도 못한 놈들한테 붙잡혀 있을 때 길채가 겪을 가능성이 있는 그 어떤 상황이 상상하기 싫은데도 상상이 돼서 마음이 너무 힘들다가, 귀 다 물어뜯으며 나오는 거 보고... 와! 감탄이 나옴.


종종이가 불안함. 종종이는 길채가 손을 내밀기 전까지 뛰어내릴 생각을 했었단 말야. 그간 길채랑 붙어 있었기 때문에 삶의 의지를 붙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전쟁이라는 거대담론적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속에서의 여성의 삶을 이렇게나 충실히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 감탄스럽고, 한편으론 그간 주류 미디어가 얼마나 왕족, 남성 중심적으로 당대의 비극을 그려왔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호명할 수 있는 이름은 한 사람을 사회 속에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여캐들의 이름을 알려준다는 건, 극 속에서 이 사람이 지나가는 어떤 배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임을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우리 길채 그 수렁에 빠졌을 때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그럼에도 정신 똑바로 차려서 다 물어뜯어버린 거 정말 놀라워.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도 그 두려움에 압도 당하지 않고 생에 의지를 놓지 않았어.


사람 목숨보다 명분이 더 중요한 장철.


원무가 안 죽어서 10화에서부터 길채가 안 들어도 될 욕을 들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벅벅 긁는다. 13화를 보고 울분이 쌓인다.


원무 하는 짓거리 때문에 짜증나서라도 길채 끝까지 살아남는 거 보고 싶다.


드라마를 보면서 작중 환경이 인물들로 하여금 무엇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가, 무엇에 명예를 느끼게 하는가를 계속 고민하게 되는데... 사실 수치심과 명예란 사회적 구성물이나 다름없으니까, 과연 허상뿐인 그 무언가가 감히 한 존재의 실존보다 귀중하다 말할 수 있는가? 를 이야기하게 된다.


"내가 살고 싶다는데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야." 라는 대사에서의 '부모' 는 길채를 비롯한 극중 여성들을 억압하는 그 모든 규범이라 생각하고... 각화의 일탈 아닌 일탈도 자신이 제국의 팽창을 위한 도구가 아닌 한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려는 시도 같아서 좋았다.


장현이 "낭자" 도 아니고 "유씨 부인" 도 아니고 "길채 애기씨" 도 아니고

"길채야" 라고 부른 건에 관하여.


체면이고 규범이고 다 필요 없고 존재로서의 유길채 하나가 간절했던 거 아니겠나. 아무리 가까워도 은애 낭자, 부인이라고 예를 갖춰서 부르는 게 정도인 시대에 비혼타령하던 그 이장현이, 그래도 양반이라는 놈이, 유길채를 잃을까봐 기꺼이 달음박질 하면서 외친 게, 유길채 이름 단 하나라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듦.


생각해보면 가부장 사회에서 아비의 권력인 성씨까지 떼어가며 오롯이 [길채] 라고만 부른 거 곱씹어 혀끝에서 굴릴수록 애절해지는 거지. [유씨 부인] 에서 유씨는 유교연과의, 부인은 구원무와의 관계 속에서 길채의 위치를 나타내준다는 점. 그 모든 걸 집어던지고 이장현은 오직 "길채야" 라고 부르짖었음을.


유길채가 이 땅에 온전히 발 딛고 살기 위해선 다른 어떤 이름도 지위도 아닌 "유길채" 로 불려야 한다.


유씨 부인이란 기준이 되는 누군가(남성)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그 기준이 되는 좌표를 찾아야만 알 수 있는 칭호고, 이 땅에 실존하는 길채는 "길채야" 라고 정확히 불러야만 온전히 호명할 수 있어.


"이렇게 정면에서 왜 내가 죽어야 해? 설령 부모가 뭐래도 나는 살거야, 하고 도리어 정절 요구하는 사회에 돌을 던지는 주인공이 나온 건 첨 같아서 시원함. [...] 국가든 임금이든 부모든 뭔 상관이야, 내가 산다는데! 이게 너무 좋아요. 지금까진 환향녀하면 정절 의심받아 괴로워하며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억울함 호소하는 캐릭터들이 대다수였는데, 길채는 사람들이 돌 던지면 똑바로 쳐다보고 당당하게 노려볼 거 같아요, 내가 뭘 잘못했냐며."


그 부모가 임금이래도 나는 살 거야.


달 아래, 태양 아래 함께 발 딛고 사는 이들에 대한 의리와 사랑을 보여줌.

지금은 이렇게 힘들지만 우리 같이 버티자. 함께 살아내자.


소현세자와 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위치를 너무 잘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대한 '구걸' 이 역겨워보이는 것.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장현의 대사를 통한 소현의 각성이 중요해 보인다.


이제 역사 시간에 호란을 다루면서 왕의 삼궤구고두례 치욕 얘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고 그만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당한 치욕과 불명예보다 더 비참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자 버텨낸 삶들이 있었는데 대체 누굴 위한, 뭘 위한 역사란 말인가.


당대 여성의 외관적 아름다움은 남성이 소유하는 물건이 가진 매력적인 속성일 뿐. 그 여성의 삶을 지켜주는 무기가 될 순 없는 것 같아서, 길채 외모 강조하는 부분이 더 안타깝고 슬펐어.


인조도 원무도 말이 두렵고 망상적 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신들의 눈으로 직시하는 게 두려워서 지켜야 할 대상을 외면한 건데, 장현과 소현은 토악질을 하고 비통함에 포효하면서도 뚜벅뚜벅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아.


각화-장현 장면도 청 황녀여도 결국 여성이기에 처지는 똑같구나 전쟁은 결코 여성을 위한 게 아니구나 느껴져서 흥미로웠어.


임금은 백성을, 아비는 자식을, 남편은 아내를 지켜준다는 명분 하에 굴린 가부장제였는데 정작 전쟁 터지니 가부장들은 지 살겠다고 현실회피하거나 도망가기 바쁘고.


자신이 이장현이 아닌 장현이라는 사실이 양부로 모실만큼 절친한 양천에게조차 알리지 못할 심연의 진실인가보네.


이장현은 공명첩을 사는 행위를 통해서 또 양반이라는 지위가 별 것도 아님을 드러내려 했을 것 같아서.


이장현이라 불러줘야 하는 건지 장현이라 불러줘야 하는 건지. 덕후 입장에서 뭐가 내가 사랑하는 남주를 위한 방법인지 고민됨. 신념을 위해 체제에 대한 저항을 위해 자기 성을 갈아엎은 사람인데 나는 그걸 존중해주고 싶어.


성씨가 가부장 문화의 정점이잖아. 그걸 자기 손으로 뜯어고친 게 맘에 들어.


바람이라면 혜민서 광증 노인이 량음이라면 그게 서사의 끝이 아니고, 빛을 보게 된 노인이 살아서 태양 아래를 걷는 장현길채를 보며 함께 웃음 짓는 것.


달리는 장면은 무슨 이유가 됐든 좋아. 양반은 뛰는 거 아니라는 쓰잘데기 없는 규범 정면으로 반박하는 거 같고, 그 목표 위치에 인생을 다 던져서라도 지키고 싶은 유길채가 있다는 거니까.


실제로도 일분일초에 생사가 달린 거나 마찬가진데 아-주 오래 기다릴 수 있다고 늑장부릴 시간이 없어.


각화도 맥락 속에 놓인 사람이라는 거. 하지만, 그 맥락이 되는 환경에 굴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삶을 살아보려는 게 보여서 좋더라고.


장현과 각화의 키스는 각화의 캐릭터성, 둘의 권력 관계를 보여주는 부분 아니던가. 애정씬 같고 그렇진 않던데. 키스를 각화가 좋아해서 했다기 보단 나는 너를 이렇듯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를 보여주는 것 같았던 터라. 드라마 자체가 물리적 관계, 제도적 관계 다 필요없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마당에 키스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딥키스도 아니고 그냥 입맞춤 수준이었는데...


사실 이장현도 길채가 왜 거기 있었는지 구구절절 묻고 싶었을 거다. 그치만 그 순간에 하고자 하는 말은 머릿속에서 뒤엉켜 이성이 마비되고, 겨우 뱉어낸 말이 "왜!!!!!!!!!!" 였으리라. 길채 앞에선 언제나 "쫌 그래..." 등과 같은 무언의 함축을 표현한 말밖에 못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내내 궁금한 건 아무리 동일언어를 쓰는 사람이라 해도 전달 과정에서 왜곡돼 자신의 진심이 오해 받는 걸 꺼리는지 뭔지, 유길채에 대한 사랑의 진심을 밝히는 건 자신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앞에서 뿐이다.


솔직히 이장현은 가족 바운더리 내에서 배운 게 없는 인물이다. 송추이랑만 해도 정신적/이상적 부모로 생각했던 거 같은데... 여하튼, 자신을 내던질,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단 걸 길채를 통해서 처음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장철이 근본으로 돌아가자 할 때의 근본이 무엇일지 걱정스럽다. 송도환 같지 않겠지만.


원무는 왜 우는가?

1. 장현이가 신분상승 시켜줘서 종사관나리 소리 들음

2. 길채가 재산 불려줘서 재산 있음

이장현 희생+유길채 목숨 값으로 살아온 게 흡사 백성들 골수 빨아서 목숨 부지하는 인조랑 똑같다고 여겨진다. 원무 지가 노오력은 했겠지만 분수에 안 맞는 위치까지 올라간 거까지 인조랑 똑같아.


공식인 역사가 인조와 구원무를 비롯한 비겁한 가부장들의 역사고 이장현과 유길채를 비롯한 이들의 삶은 "씻겨져" 내려가거나 기록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탄스럽다.


철없던 애기씨 유길채가 완전히 철이 들어버린 과정이 슬프다. 철이 든다는 건 그 사회가 성원에게, 여성에게 요구하는 걸 내재화하는 과정이고 작중 조선이 한사람의 인간이기보다는 '여자' 로서 지켜야 할 과정에 더 집요하게 집착한 게 보였기에 더 슬프다.


길채 꿈속의 서방님인 이장현의 표정은 저리도 평온한데 현실의 이장현은 자기 감정 주체가 안 돼서 어쩔 줄 몰라했다는 게 재밌음. 살아있는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


다큐도 감독의 주관이 반영된다.


역사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현실의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분투하는 한 인간의 고뇌가 보여져서 성장캐 같고 좋은데. 다 떠나서 역사에 지 혼자 잘난 영웅이 어딨어. 역사는 왕과 사대부의 기록이나 현실은 민중의 역사지. 다 같이 해낸 거잖아. 더구나 일국의 세자가 이장현 같이 이해득실 밝고 머리 팽팽 돌아가는 사람 알아보고 곁에 두는 것도 능력 중에 하나잖아. 세자가 극중 처음부터 성.군. 뚜둥- 하고 나오면 그게 더 불쾌한 포인트 아닌가? 인물을 존나 납작하게 해석하는 건데. 애초에 "변했다." 가 뭘 의미하겠어. 심양에 가기 전에는 인조를 비롯한 여느 왕족이랑 다를 바 없었다는 거잖아.


소현을 인조와 대립시키면서 소현의 성군 자질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나.


토악질 하면서까지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용기, 일견 불손하게 들리나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자를 곁에 두는 지성, 자신과 왕조의 논리가 정正이라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반反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합合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


원무와의 삶에서 길채가 재산을 불리며 승승장구하는 모습만 보여서 그렇지, 아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제 역할 못하고 붕괴돼버린 가부장인 아비가 있는데 그 삶이 순탄했겠나 싶음. 밤에는 내 목 조르는 아비여도 그래도 아비니까 낮에 고깃국에 흰쌀밥 먹이고자 하는 게 그 시대 유길채들의 삶이었겠지.


병자호란 때 희생된 조선 여성들에 대한 황진영 작가의 한풀이 굿. 그런데 그 한풀이굿이 오늘날까지 유효한... 나는 이장현이랑 이장현 누이 한풀이도 좀 해줬으면 좋겠어.


'연인' 이라는 드라마가 불륜을 가시화한다면 그건 불륜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중심 일부일처제는 여성을 제도적으로 속박하는 족쇄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자타공인 닳닳사였던 이장현은 혼인 유무를 떠나 남성이라 평판에서 자유롭고 유길채와 각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혼인 제도에서 자유롭지가 못한데 드라마를 보고도 불륜 타령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 드라마는 내내 혼인이라는 제도로 '묶이는' 존재들은 모두 여성임을 보여준다. 그 묶인 존재들이 전쟁이라는 거대참극에 휘말리면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러면서 다시 제도가 강조하는 규범의 모순을 짚는다. 정말이지 촌스럽다 이야기될 정도로 돌림노래 수준으로 오조오억번 얘기하는 수준인데. 그렇게 혼인으로 묶여도 <남의 집> <아들> 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거 보고 피눈물이 흐르지 않나.


나가, 다 나가.

유길채, 이장현을 이해 못하는데 드라마를 왜 보고 있어.


매거진의 이전글 연인戀人, 단상 #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