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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pr 09. 2023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가 같지 아니하니

책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은 서구 르네상스 시기, 투시법이 (소설에서는 원근법이라 지칭되나 투시법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터키 이슬람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그들의 사상과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사실 영향이라 쓰고 위협이라 읽는) 끼치는가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며칠 전 병렬독서 하던 다른 책들이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아서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에 책장을 째려보다 골라들었고, 이후 저자의 <하얀 성> 을 읽어볼 예정이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겠지만서도, 이 작품을 소개할 때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 건 정말 몰염치한 일이라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 카라와 여자 주인공 세큐레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이종사촌 사이인데, 카라는 세큐레가 열두 살 때부터 좋아했고 (세큐레가 열두 살이면 카라는 스물네 살 ··· ) 그걸 들켜서 세큐레에게서 멀어졌다고 끊임없이 징징거린다. 작품 전반에 걸친 다른 인물의 시각을 통한 세큐레에 대한 묘사와 <나는, 세큐레> 로 이어지는 세큐레 본인의 생각을 종합해 보아도 세큐레는 남자 주인공이자 세밀화가인 카라, 시동생 하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또 다른 세밀화가 올리브의 욕망의 대상, 혹은 아버지 에니시테의 (혹은 죽은 남편의) 소유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밖에 그려지지 않으며, 작품에서 여성이라고는 세큐레와 창녀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봤자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포함하여 세큐레 하녀의 포지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들뿐이다. 여하튼, 중간중간 구역질 나는 부분이 일부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그림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했으며, 세계의 근원이 되는 신은 인간에게 "보라" 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이 보라고 명한 것' 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신의 명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요, 세상을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기억'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도, 신이 주었던 어둠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생을 신의 말씀을 구현해내기 위해 세밀화를 그려왔던 위대한 장인들은 색채 안에서 시간 너머의 어둠을 보고자 한다.


Battle of Keresztes, Part of the Long Turkish War


작품의 묘사에 따르면, 세밀화가의 작품에 있어서 '화가가 누구인지' 는 중요하지 않다. 화가는 신이 "보라" 라고 한 것을 재현해내는 신의 도구일 뿐이며, 인간 마음속 삶의 풍요와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가 가진 다채로움과 그에 대한 존경심 및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정제로 대표되는 이슬람의 술탄 체제는 표면상으로는 위대한 알라(신)가 있고 그 알라의 뜻을 받들어 왕인 술탄이 통치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그 알라의 자리에 술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탄은 세계의 근원이며, 술탄의 명이 곧 진리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근원인 '그' 술탄이 (1) 베네치아 장인들의 그림처럼 (2) 자신의 세계 전체를 재현하길 원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사실 술탄을 꾄 건 베네치아로 파견을 다녀온 후 새로운 문명에 감화받은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스테였는데, 그는 화풍에서 만큼은 작중 그 어떤 세밀화가보다도 진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슬람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종교이다. 이에 따라 당시 그림은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림 자체' 를 위해 존재할 수는 없었다. 처음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 화풍에 따라 그려진 그림을 본 에니스테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주입한 세계관에 따라 "어떤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곧 그림이 이야기가 아닌 그림 그 자체를 위해 그려졌음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점점 이세계異世界 의 화풍에 매료된 그는 술탄의 세계, 즉 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 을 그린 '초상화' 를 그리고 싶어 한다. 문제는 베네치아 화풍의 그림이 신성모독적이란 것이다. 술탄으로 상징되는 '신이 정한 중요성'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진다. 즉, 세상의 중심이 화가 본인이 되는 셈이다.


The School of Athens, Raphael


작품 속에는 각 인물이 고뇌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조사원을 자처하는 카라는 차치하고, 극 중 에니스테, 화원장, 나비, 황새, 올리브으로 대표되는 각각의 세밀화가들은 작 초 다음 질문에 마주한다. "세밀화가는 스타일style 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스타일style 이란 무엇인가. 스타일은 '지금, 여기' 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화가)' 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신의 세계를 재현해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화가의 자의식 표출이자,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작중 신실한 세밀화가들은 선대 거장들의 스타일을 모사하고, 그에 따라 신앙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스타일을 드러내는 건 죄악이자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러나 에니스테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그린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스타일은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까지 바꾸며, 그 예술풍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이자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그림' 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 속에 숨겨져 있으며, 사람들이 보자마자 나쁘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여길 그림 안에 숨겨져 있다. 진정한 화가는 <그곳> 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곳> 에 이르렀을 때의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이런 에니스테의 견해에 반反 하는 화원장 오스만을 위시한 보수적 세밀화가들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신(술탄)의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로서만 국한한다. 그들에게 있어 말을 그리다가 장님이 되고, 장님이 된 자의 손이 '외워서' 말을 그린다는 건 하나의 축복이다. 그들은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고 그 화풍을 위한 다양한 테크닉을 익히는 것은 재앙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신의 시간 속에 남고 싶은 그들은 (사실 변화를 받아들이기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눈을 찔러 '빨간' 피로 뒤덮은 눈으로 영원의 '검정' 속으로 잡아 먹히듯 침잠한다.


어떤 견해를 따르든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다음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1) 얼마나 완벽한 인생을 살든, 얼마나 완벽한 그림을 그리든 간에 유한한 삶을 사는 화가(인간)는 자신의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란 걸 인지해야 하며 (2) 세밀화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간에 그림 자체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시간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방법은 뛰어난 기술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즉 아무리 자신의 예술성에 대해 자의식을 표출하고 싶어도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결국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그 어둠 속에서 다시금 건져 올려져 색을 발하게끔 하는 것은 화가의 자의식에서 발로되는 예술적 탁월성을 향한 추구라는 것이다.


작중 세밀화가들은 실제로든 표면상으로든 술탄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에니스테에 따르면, 술탄은 - 모든 술탄이 그러하듯 - 세밀화가가 재현해낸 신의 세계인 '그림' 이 아니라, 그림 속 '자신의 모습' 에 매료된다. 그 과정 속에서 술탄 자신이 표면적으로 중시했던 신이 창조한 세계를 재현해내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세밀화가들의 존재 또한 지워진다.




작중 여러 화자가 있는데 책의 이름은 왜 <내 이름은 빨강> 인지를 고민하며 읽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작품은 화려한 세밀화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두 가지 주요 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빨강> 과 <검정> 이다. 앞서 말했듯, 그림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 신이 보라고 명한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이전의 '세계의 근원' 이 되는 세계, 위대한 장인들이 색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고자 했던 어둠의 세계가 바로 검정의 세계이다. 삶의 이전과 이후를 지배하는 색이 검정인 것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작품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카라(Black, 검정)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술탄(신)의 명령을 받들어 조사하며 사건의 실체와 관련된 모든 것에 근접하게 되는 사람, 세큐레로 상징되는 사랑과 신의 도구인 세밀화가의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 세밀화가였으면서 여러 해를 이스탄불 바깥의 세상을 떠돌아다녔기에 한 세계의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일 수 있는 사람. 작중 카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인간적인 고뇌를 하고 있노라 이야기하나, 읽는 내내 작가가 동서양을 모두 경험하고 신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 전의 어떤 초월적 존재를 카라로 설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빨강이란 무엇인가. 핏덩이 인간이 세상을 처음 만나며 감싸이는 색. 이스탄불 '바깥' 세상에서 카라가 가지고 선물해온 물감통 속 에니스테가 넣어두었던 빨간 염료, 어쩌면 화가로서의 그의 영혼. 세큐레가 카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입었던 빨간 옷, 바늘을 가지고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눈 멈을 자처했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느꼈을 살아 있음의 상징,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망자를 감쌌을 비린내 나는 피. 작중 '빨강' 이 자칭했듯 빨강은 삶의 "어디에나 존재" 하며, 삶의 면면을 함께 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부인하나, (빨간) 색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되라!" 라는 명과 함께 어디에나 존재하는 빨강은 어쩌면 이 작품 속 세계관을 관통하는 세계의 의지, 혹은 세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피와 함께 진행된 두 세계관의 충돌은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신의 세상에 더 근접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속에서 현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개인의 필사적인 분투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은 '베네치아' 화가들도 소실점과 투시점의 중심에 예수를 비롯한 자신들이 중시하는 인물들을 놓는 것의 연속이었고,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이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화가 개인의 예술적 탁월성을 추구하다 보면 신이 "보라" 라고 명한 세계를 더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갈 수 있음 또한 몰랐던 것 같다.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가
같지 아니하며

<코란 제 35 장 「파티르」 19 쪽>

·

동방과 서방이
신의 것이니

<코란 제 2 장 「바까라」 11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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