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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Apr 09. 2023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타자를 사라지게 하는 디지털 아멘

책 <사물의 소멸>, 한병철 저


사물事物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현세대 인류는 과잉정보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스마트폰 스크린 속 소통을 위해 발악하는 우리는 '지금, 여기' 에 있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루는 세계사물에 관해 잊어가고 있다. 현실 속 가늠할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외면하고 스마트폰 세상 속으로 눈을 돌린 우리는 정보화된 이미지를 통해 타자를 대상화하고 '처분'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를 처분 가능한 정보화된 디지털 그림으로 만들고, 그렇게 제작된 (디지털화된) 세계는 과도현실적 실재와 다름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쓰다듬으며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 끊임없이 정보를 생산하며 <좋아요> 라는 '디지털 아멘' 을 받고자 애쓴다. 타자를 쫓아내기 위해 SNS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꾀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날 디지털 인류의 구호는 '공유' 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우리 자신을 내보이고 연출한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절대화시키기 위해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마저 지운다.


그런 우리는 진정 '소통' 을 통해 '공허함' 을 채울 수 있는가. 한병철 교수님은 스마트폰을 통한 과도소통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닌, 타자를 '너' 라는 존재가 아닌 '그것' 으로 만들어 사라지게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즉 스마트폰은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타자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론적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


이에 대해 <사물의 소멸> 은 인간에게 (1) 무언가를 할 능력과 (2) 아무것도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며, 과도활동에서 탈피하여 고요하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하염없이 머무를 능력을 강조한다. "네게 장미가 소중한 이유는 네가 장미를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라는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말처럼 삶의 어떤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누군가를 다른 이와 구별하는 무언가는 <지금, 여기> 에서 <함께> 머무르는 시간의 차이임을 이야기한다.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갸웃하게 되는 책이었다. 손글씨를 쓰는 게 타이핑을 하는 것보다 좋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수기로 쓸 때면 내 생각을 온전히 다 잡아내어 표현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자를 치면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인공지능에 관련해서는 이전에는 나 또한 컴퓨터가 인간이 제공하는 정보의 상관성만을 파악할 뿐 인과성을 파악할 능력까진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 현세대 인공지능은 이제 막 세상을 '인식' 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다소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영상 속 교수님에 따르면 "정보의 양이 늘어나니 컴퓨터가 세상을 '인식' 하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가 더 늘어나면 세상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처리하고 생산해내는 단계까지 갈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 세상보다는 내가 직접 만지고 접할 수 있는 존재 및 물체를 자각하며 살아야겠다는 반성이 든다.




읽던 중의 기록.


<사물의 소멸> 이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물론 타자의 추방 때처럼 뒤에 이해 못 할 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놀랐냐면 처음 샀을 때만 해도 첫 페이지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었기에. 본디 논문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대중을 고려한 친절한 책은 아니기에 다른 저서들을 읽으면서 쌓아온 관련 지식이 없으면 뇌가 계속 뱉어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이 저자의 다른 저서와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인터뷰가 있다. 역자 후기도 아니고 한병철 교수님의 말. 새삼 '구어' 의 힘을 느꼈다. 이 인터뷰가 정말 쉽게 읽히는데 중요한 건 저자의 저서 대부분에 관한 방향성이 녹아 있기에 한병철 교수님의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읽기가 너무 버거우신 분들은 <사물의 소멸> 뒤에 수록된 인터뷰를 꼭 챙겨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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