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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May 04. 2023

무지와 위선의 '순수' 속에서 눈을 감다

책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저

의무와 관습에 사로잡힌 뉴랜드 아처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무지와 위선, 인습을 자각하고도 '보통의 삶' 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의 꿈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회한에 사는 이야기. 설계된 무지와 위선으로 이루어진 '순수' 한 세계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으며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메이 웰랜드와 연을 맺게 되어 감사하던 뉴랜드 아처. 엘렌 올렌스카의 등장은 진실은 말하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희미한 암시와 미묘한 뉘앙스로만 이루어진 그의 세계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혼 후 다시 완벽한 미국인이 되고 싶은 엘렌 올레스카는 "내가 이미 오래전에 눈뜬장님이 되었던 것들을 보도록 내 눈을 띄워 달라" 는 이야기와 함께 뉴랜드 아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사회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주 오랫동안, 세세히, 마음이 불편해질 만큼. 그러는 사이 뉴랜드 아처는 자유롭고 인습에 저항하는 엘렌 올렌스카에게 이끌리게 되고, 동시에 젊은 여성을 산 채로 묻어 버리려 하는 '보통 사람들' 의 위선을 자각해 질식할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모순투성이에 실체 없는 허구에 불과한 '순수' 로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뉴랜드 아처는 엘렌 올레스카를 원했지만 자신이 자라온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의무와 관습을 깰 용기는 없었고, 엘렌 올레스카는 자신의 존재가 뉴랜드 아처와 메이 웰랜드의 결혼생활에 상처로 남길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뉴욕 사회가 부여한 의무의 존엄성으로 말미암아 메이 웰랜드와의 결혼을 유지한다. 사랑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엘렌 올렌스카는 그가 살면서 '일상' 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그 모든 것의 집약체인 환상으로 남게 된다.



이 작품은 중반부부터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결말에 이르러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종속된 환경의 인습을 견디지 못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이야기인데 그는 과연 자신의 꿈이자 환상이었던 존재를 <잃었던> 것일까 <버렸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뉴랜드와 엘렌이 서로를 아무리 사랑했다고 한들 헤어져 있었던 생애 절반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에겐 현실 속 각자의 삶이 있었고, 그 속에서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젊은 날의 추억으로 빛바래질 뿐이었다. 서로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존재로 남게 된 선택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발췌


[...]  모든 것에 꼬리표가 붙어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죠.


[...]  문화라고! 그렇지, 우리한테 문화가 있다면! 하지만 잡초를 솎아 주지도 않고 교잡해 주지도 않아서 여기저기서 말라 죽어 가는 조그만 땅뙈기 몇 군데뿐이잖나. 자네 선조들이 가져온 옛 유럽 전통의 마지막 자취들이지. 하지만 자네들은 가련한 소수자일 뿐이야. 중심도 없고, 경쟁도 없고, 관객도 없어. 버려진 집의 벽에 걸린 그림 같다고 할까. 자네들은 결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 소매를 걷어붙이고 진창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말이지.


[...]  여기에 진실이, 현실이, 그에게 속한 삶이 있다.


[...]  그는 결혼 생활에서 첫 여섯 달 동안이 제일 힘든 법이라는 흔한 격언을 위안 삼았다. '그 시간만 잘 넘기면 서로의 모난 면들이 닳아서 둥글둥글해지게 될 거야.' 그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메이가 가하는 압력이 그가 가장 날카로움을 잃고 싶지 않은 바로 그 모난 부분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  가장 정묘한 기쁨을 얻으려면 얼마나 많은 어렵고 초라하고 천한 것들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지 미처 몰랐나 봐요.


[...]  그들은 밀폐된 공간에 누구의 방해도 없이 단둘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운명에 단단히 묶여 있어서 차라리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


[...]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서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그때는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죠.


[...]  함께한 긴 세월을 통해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  그가 성장해 온 작은 세계에서 남은 것은 무엇이며, 누구의 기준이 그를 굴복시키고 속박했던가?


[...]  우리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안심할 수 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거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옛날에 아버지가 어머니의 청에 따라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래요.


[...]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드는 무수한 회한과 한평생 억눌러 온 형언할 수 없는 기억들을 감당해야만 했다.


[...]  생애의 반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갈라져 살았고, 그녀는 그 긴 세월을 그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로서는 희미하게 추측해 볼 뿐인 사회에서, 그가 결코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할 조건들 속에서 보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그녀에 대한 젊은 날의 추억을 지니고 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다른 현실의 친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도 그에 대한 기억을 한구석에 따로 간직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 해도 작고 음침한 성당에 안치된 유물 같은 것이 틀림없었고, 매일 그곳에서 기도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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