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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May 04. 2023

나는 당신의 평화보다 나의 불안을 사랑한다

책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저

오직 의식과 의지만으로 '존재' 하는 아질울포는 비인간적일 만큼 순백의 색으로 빛나는 갑옷 속 기사이다.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그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기록들로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작위와 칭호에 집착하는 자이다.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는 실존하나 존재에 관한 자각이 없는 자이다. 그의 이름은 구르둘루이면서 구르둘루가 아니기도 한데, 이는 "어떤 이름이든 그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고 흘러가" 버리기에 어떻게 부르든 그에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기사와 실존하나 존재하지 않는 하인 사이에, 생명 넘치게 살아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있다. 바로 랭보, 브라다만테, 소프로니아, 트라스만드이다. 특히 아버지의 명예를 울부짖으며 기사단에 뛰어든 랭보는 완벽한 기사 자질을 가진 아질울포를 동경하면서도 브라다만테의 사랑을 받는 아질울포를 질투한다. 브라다만테는 아질울포를, 랭보는 브라다만테를 사랑한다.


내 이름은 바로 이 여행의 끝에 있소.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아질울포에게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이름> 과 <작위> 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트라스만드의 주장으로 한 순간에 존재의 위기를 겪게 된 아질울포는 자신의 이름과 작위를 지키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 나선다.


작품의 제목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라 아질울포가 주인공인 것 같으나 사실상 랭보와 브라다만테가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관념으로만 이루어진 아질울포와 육체로만 이루어진 구르둘루 사이, 실존과 비실존 사이, 삶과 죽음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인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사랑을 위해 기꺼이 현재의 자신을 내던지는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발췌


아질울포는 시체를 끌고 가면서 생각한다.

오, 죽은 자여, 너는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되지 않을 시체로구나. 다시 말하면 넌 시체로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까 바로 이 때문에 가끔씩 우울한 순간이면 놀랍게도 난 존재하는 인간들을 질투한다. 굉장해! 난 특권을 지녔다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어. 육체가 없이도 살 수 있고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들이지. 난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수많은 일들을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조잡함이나 부주의함이나 지리멸렬함 같은 결함 없이, 악취를 풍기는 일 없이 말이야.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비밀이 바로 여기, 이 자루 같은 배 속에 있다면, 고맙지만 난 그 배 없이 살겠어. 여기저기 찢긴 알몸의 육체들로 뒤덮인 이 계곡은 그래도 아수라장 같은 인간 세상보다는 덜 끔찍하군.


구르둘루는 시체를 고 가면서 생각한다.

시체야, 넌 내 방귀보다 훨씬 더 고약한 방귀를 뀌었겠지. 왜 모두들 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네게 부족한 게 뭐 있어? 처음에는 네가 네 몸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네 몸에서 자라는 이 구더기들이 너 대신 움직이잖아. 예전엔 네 손톱과 머리카락들이 자랐지. 이제 네 몸에서 물이 흘러나와 거름이 되어 풀밭의 풀들이 햇볕을 받으며 점점 더 잘 자랄 수 있게 해 줄 거야. 넌 풀이 되고 풀을 먹은 젖소의 우유가 되고 우유를 마실 어린아이의 피가 될 수 있어. 봐,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시체야?


랭보는 시체를 끌고 가면서 생각한다.

망자여, 내게 발목을 잡혀 끌려가는 당신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발목을 맡기고 끌려가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 여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부릅뜬 당신의 눈과 바위에 부딪혀 뒤틀린 당신의 머리가 놓인 곳에서 바라본 이 광기, 나를 몰아치는 이 광기와 전투와 사랑에 대한 갈망은 대체 무엇입니까? 난 그것을 생각합니다. 망자여, 당신 때문에 난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뭐가 변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나 죽은 당신들에게나 무덤에 가기 전의 이 하루하루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날들을 낭비하지 말라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헛되이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 날들이 내게 주어졌을 겁니다. 프랑스군을 위해 뛰어난 행동을 하라고, 자존심이 강한 브라다만테를 가슴에 안고 또 그녀에게 안기라고 그런 날들이 주어졌을 겁니다. 망자여, 당신 생애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길 바랍니다. 어쨌든 당신의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내 주사위는 아직도 요술 주머니 속에서 소용돌이칩니다.


망자여,

난 당신의 평화보다는
나의 불안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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