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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화목 Jan 14. 2019

취한다는 건

술을 마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테니지만 확실한 이유는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술이 취하는 기능을 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 맛없는 것을 마실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중진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술에 취하면 많은 사람들은 솔직해진다고 한다. 우는 사람, 웃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수다스러운 사람, 욕하는 사람, 폭력 쓰는 사람 정말 각양각색의 솔직한 마음과 행동들이 술을 다리 삼아 쏟아져 나온다. 쉽게 말해 '주사'라 일컫는 것이 내게도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알코올은 나를 '업'시켜주는 제법 훌륭한 역할을 하는 녀석이라 말할 수 있겠다.

'술병은 쓰러트리는 맛'

쉽게 떠오르는 농촌의 풍경엔 막걸리를 마시는 농부들의 모습이 있다. 논두렁에 걸터앉아 마시거나, 마당 탁상 위에서 부침개를 부쳐 마시거나 하는 모습들이 아마도 농촌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농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은 역시나 '소주'다. 내가 사는 동네 식당엔 막걸리를 판매하지 않는 곳이 많다. 그만큼 막걸리가 농촌에서 인기 있는 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대학가의 식당거리나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전통시장, 축제장에서 더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를 농부 아저씨들에게 여쭈어 보면 막걸리는 너무 배부르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도수가 약해 많이 마셔야 하기에 취하기 전에 배가 먼저 불러버린다는 것이다.

'술은 취하기 위해', '술병은 쓰러트리는 맛', '술은 권하는 맛' 취함을 위한 것인지 술을 위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술자리들.  어찌 보면 재미나거나 흥미로울지 모르겠지만 함께 마시는 입장에선 여간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다.


'상대방 보다 먼저 취하면 진 것이다'


이게 무슨 논리인지. 술을 마시다 보면 무슨 이유로 마시는지 잃어버릴 때가 많다. 그저 취하기 위함일까 고민하다 쓰러지고 마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특히나 직장생활을 하게 되면 회식이나 대접(접대)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다니는 영농조합에서의 일이다. 농산물을 납품하는 주거래처에서 가끔씩 생산지를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대접(접대)하는 한 사람으로 참여할 때가 있다. 대접(접대)이라고 해봐야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 하는 정도인데 그때 나는 취하면 안 되는 이유 같은 것이 존재한다. 누구의 지시 같을 것을 받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방문한 상대방보다 먼저 취하면 왠지 '을'이 되는 느낌이랄까, 기분이랄까. 그래서 그땐 '오기'로 술을 마신다. 내일은 존재하지 않은 세상인 듯 상대방이 빨리 취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미친 듯 고개를 젗어 목구멍에 소주를 들이붑는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해야 하나. 한국사회가 강요하는 위계의 협박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무력화하기 위해 사용되는 '술'은 '무기'나 진배없다.

'잊고 싶어서'

취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현실 부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환상 속에 잠시 머무는 것'이렇게 하면 잘 표현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환상 속에 술은 친구와 싸웠을 때 먼저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술, 수즙게 참고 있는 수많은 말들을 시원하게 내보낼 수 있는 술, 강요받지 않고 골라서 주량껏 마실 수 있는 다양한 술,  그리고 모두가 흥겹게 떠들 수 있는 맛있는 술이다.

덧붙이자면 '절제'가능한 사람이 술을 가장 잘 마시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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