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이면 우리 4형제를 위하여 '큰 빵'을 사오시곤 하셨다. (여기서 '큰 빵'이란 잼이 잔뜩 들어있는 맘모스 빵을 말한다) 지금은 언제 어디서나 살 수 있고 먹을 수있는 빵이지만, 어렸을 적에는 1년에 딱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귀한 빵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면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긴 노동의 댓가인 땀 냄새와 한 잔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큰 빵을 품고 들어오셨던 아버지...누가 뭐라 얘기하지도 않아도 그순간만큼은 모두들 아빠를 부르며 아버지 품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버지 품에서 재빨리 '큰 빵'을 탈취(?)하여 4형제가 야금야금 밤새 다 먹어치웠다.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흡족한 눈으로 자식들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길이 기억에 선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큰 빵을 기다렸을 지도 모르겠다.
빵을 하도 좋아하다보니 내 별명 중 하나가 '빵돌이'였다. 하루는 큰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 엄마가 보름달인가 카스테라인가를 아이에게 사주고 잠깐 볼일보러 나간 적이 있었다. 나는 옆에서 한참 책을 읽다 큰 아이가 빵먹는 것을 슬쩍슬쩍 곁눈질해보았다. 아니다. 참아야한다. 허나, 아이가 먹는 빵 향내가 코끝을 간지럽혀 끝내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아이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도형아, 빵 좀 나눠주라..." "..."
에고, 세상에나...코묻은 아이 빵을 빼앗아 먹는 아빠라니...헐~
아이 엄마가 돌아와보니 아이는 엉엉 울고있고, 아빠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보름달 빵을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능...그날 등짝 스매싱을 톡톡히 얻어맞은 기억이 가물하다.
이렇게 빵을 좋아했던 나는 작년에 3주간 동유럽 여행을 갔다오고나서 아예 빵이라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물려버렸다. 아침이면 빵~ 점심에도 빵~ 저녁에도 빵~ 거의 삼시 세끼를 빵으로만 때웠기 때문이다. 어찌나 빵에 질렸는지 귀국하고나서 한 달동안이나 빵 뿐만 아니라 햄버거나 피자 등등에서 나는 빵 냄새가 역겨울 정도였으니...
그러고나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이듬해 프랑스 여행을 또 신청하여 2주간 남프랑스 여행을 하였는데(그때는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 그때는 의외로 괜찮았다. 김치, 멸치 등 짠 반찬을 충분히 가지고 간 까닭도 있었지만, 파리의 호텔 식사 자리에서 보았던 어떤 파리지앵 때문이었다.
그는 큰 크로와상을 커피에 적셔 한 입 한 입 천천히 먹어치웠는데, 그가 차려입은 정장과 짧게 자른 머리, 우수에 젖은 푸른 눈까지 더해진 그 식사 장면은 마치 한 편의 사진작품처럼 내게 다가왔다. 정말이지 파리지앵은 먹는 행위 자체도 예술이었던 것이다.
나도 그를 따라 진한 커피에 천천히 크로와상을 빠뜨려가며 예술적으로(?) 먹어보았다.
아, 크로와상은 이렇게 먹어야하는구나
정성을 다하여 한 입 한 입 몰입하다보니 그제서야 진정한 빵의 본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전까지 여행시간에 쫒겨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었던 때와 달리, 이제 빵은 나에게 질릴 틈을 주지 않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냥 빵을 먹는 것이 아니었다. 빵 한 입을 씹을 때마다 발효된 빵의 반죽과 버터 향기가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일일히 확인하면서 그 순간의 문화와 사색을 즐기는 것이었다.
게다가 초승달 모양의 크로와상' (Croissant)’은 빈 2차 포위때 오스만 제국과의 역사적 에피소드까지 있으니... 어쩌면 파리지엥들은 아침마다 그날의 제빵사들을 추모하면서 잘근잘근 씹는 리추얼을 행하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더불어 코로나19가 많은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한 2020년이 저물어가고있다.
멀리서 4형제의 이름을 부르며 품에 '큰 빵'을 끼고 언덕길을 올라오셨던 우리 아버지의 사랑과 먼 나라에서 경험했던 '크로와상'의 인문학적 추억이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교차하는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나도 큰 맘모스 빵을 하나 사서 옆에 끼고 퇴근해야겠다.
-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둔 어느날, 용모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