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문방구로 이사가다
사당동 산 95번지.
어렸을 때 살던 집 지번이다. 50여년전의 아득한 시대의 지번을 아직도 외울 수 있는 것은, 사실 엄마 때문이다. 사당동 시절을 회상할 때 엄마는 '사당동 집'이나 '동작구 집'이라고 하지않고 늘 '95번지에 살 때'라고 꼬박꼬박 지번으로 말하곤 했다.
평지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산 95번지까지 가려면 어른 걸음으로 보통 25분~30분...언덕배기 중턱까지 올라가야 비로소 붉은 색 기와를 얹어놓은 우리 집 지붕이 간신히 보였다. 또, 거기서 집까지 올라가려면 무려 30여개의 가파른 계단을 거쳐야 했는데, 시골에서 외할머니라도 오시는 날에는 누군가 부축해서 사 오십 분은 족히 땀을 같이 흘려야 했다.
산동네치고는 비교적 외관도 깨끗하고 파란칠의 대문이 선명한 양옥집이었다. 또, 셋집이 아닌 자가 주택이어서 엄마는 주변 아주머니들 모임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았다. 뉘엿 뉘엿 여름 해가 저물면, 나는 집 옥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다리를 꺼떡대며 끝없이 펼쳐진 산동네의 야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한참 있으면 이윽고 누런 잠바를 입은 중년 남자 한 명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침없이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부터 내 이름과 어린 여동생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이제 이사간다"
어느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어디로?"
"응, 아랫동네 문방구 집으로..."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완구류와 도서, 노트 등이 꽉 차있고 바깥에는 아이스크림 냉장고도 있는...아이들이 수퍼 다음으로 좋아하는 문방구가 우리집이 된다? 이제 아랫동네 수퍼 주인집 아들 겸이 녀석보다 더 폼나겠는걸.
맘이 들떴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폈는데 글자는 안들어오고 자꾸 문방구 집이 생각났다. 태권V가 새겨진 향나무 연필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고, 귀여운 미소를 짓고있는 빨간 돼지 저금통이 통째로 걸어다녔으며, 그토록 실험하고싶었던 과학 실험 키트들과 완구들이 방안 가득 지천에서 유혹하고있었다. 고로롱 고로롱 코를 골면서 어느새 나는 행복하게 꿈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드디어 95번지 산동네 집을 떠나 이사가던 날, 가게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고심하다 엄마는 정성 문방구라고 짓자고 결정했다.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가게를 꾸리자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간판쟁이를 불러다 간판을 단다, 내부 물건 리스트를 인계받아 검수한다, 집 안채 방에 도배를 한다...하루종일 뚝딱거리다 드디어 우리만의 가게가 완성되었다.
비록 단칸방이 붙어있는 10여평의 가게에 불과하였지만, 문방구집은 이후 20여년동안 우리 남매들을 먹여살린 일등 공신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밀물처럼 밀려오는 꼬맹이들에 우리 가족은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준비물을 사러 온 국민학생에서부터 중 고등학생까지, 한 걸음 뗄 수가 없을 정도로 가게 안으로 밀려들었다. 나도 당장 등교를 해야하는 꼬맹이었지만, 손을 걷어부치고 엄마와 함께 물건(당시 문구용품을 우리는 그냥 물건이라 불렀다)을 팔았다.
그런데, 이사온지 하루만에 우리가 그 많은 문구점 가격을 어찌 알겠는가...요즘 같으면 POS 기기로 훑기만해도 되지만, 그때는 가격을 잘 몰라 대충 낡은 견출지에 붙어있는 가격표대로 팔거나 가격이 붙어있지않은 물건들은 대충 어림잡아 판매했다. 그리고, 나름 마케팅 기법이라할 수 있는 '덤'과 '스티커(한 면을 꽉 채워 가져오면 상품을 제공하였다)'를 제공하여 일단 아이들에게 새 문방구의 존재감을 알렸다.
당시 문방구집의 하루 매출액은 당시 삸바느질과 목공일을 하셨던 어머니 아버지의 수입을 몇 배 웃돌았다. 이사 후 부모님은 만면에 화색이 돌았고 살림살이는 그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많이 나아졌다. 그리고 달동네여서 그런지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지금도 우리 가족 모임에 빠지지않는 화제거리는 그당시 사람들에 얽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누가 문을 열다 유리창이 깨져서 동맥이 나갔네, 누구 집 아들이 깡패가 되었다네, 어느집 딸래미는 고등학생때 벌써 임신했다네...등등. 그 중 우리 가족을 많이 도와준 어느 약사의 이야기부터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