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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틀란 May 30. 2023

나의 옛날이야기(1985)

어떤 그리움, 골목

차들이 가다 서다 반복하는 길위에서 라디오 채널을 여기저기로 돌립니다. 오늘따라 다들 예민한 문젯거리들만 이야기하네요.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사회문제까지. 하긴 다들 엮여 있어서일테죠. 세상에 하나만 똑 떨어져 생기는 일이 있던가요. 골치가 지끈거립니다. ‘이럴 땐 차라리’ 싶어 노래영상을 찾아서 귀로만 듣습니다. 통 통 퉁퉁퉁- 테스트하듯 수줍게 튕기기 시작하더니 기타간주가 엷게 시작됩니다. 따뜻하면서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흐릅니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하….

조덕배의 <나의 옛날이야기>입니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마음은 흑백사진들이 누운듯한 낡은 사진첩 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제 골목이란 공간은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박제된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배경의 흑백기억이 바로 밝아집니다. 골목은 쓸쓸한 것이 아니라 활기가 넘치고 재잘대는 소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앞단발머리 꼬마여자아이는 양옆으로 쥔 두 아이의 고무줄 위를 날아다닙니다. 아, 춤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네요. 고무줄을 가르며 뛰고 돌고 밟고 머리를 흔들 때마다 그 반동에 출렁이는 앞단발이 햇살에 반짝입니다.


페인트칠이 대충 벗겨진 나무 대문 앞에 바짝 붙어 있는 몇몇 아이들은 동글동글한 작은 돌멩이들을 공중으로 올렸다 흙바닥으로 내렸다 받으며 공기놀이를 합니다. 다섯 개로 놉니다. 아직 채 다 크지 않은 조막손은 다섯 개를 모두 모아 쥐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놉니다.


건너편 열린 대문앞에는 할매가 신문지를 펴고 나물거리를 고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반찬은 그 나물일 거였죠. 공기를 놀다가 슬쩍 할매 신문지 위를 쳐다본 아이는 입을 삐죽입니다. 그거 맛도 없는 쌉싸래한 나물입니다. 맛없다고 헛숟가락질하다가 엄마 등짝 맞은 기억이 나는지, 약간 입꼬리가 쳐지기도 하네요. 옆집 경아네처럼 따신 밥에 마가린 비벼서 한번이라도 먹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습니다.

 

경아네 대문앞에는 기다란 나무의자가 고생중입니다. 오랜 세월 받치고 있느라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삐걱 소리 내는 다리가 아파보이네요. 할배 두분이 장기판을 올려놓고 장기돌을 입으로 두고 계십니다. 할배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경아가 골목 모퉁이 돌아 있는 점방에 가서 막걸리를 주전자에 받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할배들 얼굴이 불콰해져서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사철가를 부르시고, 할매가 눈 흘기며 들어가시고 얼마쯤 시간이 흐릅니다. “들어와서 손씻고 밥 먹어.”, “밥먹고 숙제해.” 엄마들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까지 골목에서 아이들은 원 없이 놀았습니다.      


어린 날 골목은 그저 낮의 기억이 대부분입니다. 낯선 골목을 들어섰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 몇 바퀴째 돌다가 만난 어른에게 ‘집을 못찾겠다’ 말하면 되었습니다. 평상 끝에 앉아 울어서 꼬질꼬질해진 얼굴로 어른이 주신 술빵 먹고 있으면 엄마가 오셨죠.     

 

골목이 밤의 기억이 될 즈음, 골목길에는 빈집들이 늘어 갔습니다. 길 건너편 대단지 아파트로 다들 이사를 시작했으니까요. 낮이 되어도 할매도 할배들도 계시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놀지 않았죠. 그러거나 말거나 두근 세근 뛰는 가슴으로 오래 오래 잡고 있던 선배 손이 무척 따뜻했던 기억이 납니다. 집 근처 골목길을 몇십 번이나 오갔던지요.


아, 사랑따위 일생에 도움이 안된다며 현실로 돌아섰던 시간이 왔나 봅니다. 그리고 선배는 우리집 골목길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까요. 아니죠. 지금은 가끔 화려하지만 낯설고, 북적이지만 국적불명인 음식점과 술집 가득한 그곳이 나타납니다. 그 순간, 사진첩 속 아정한 골목을 떠올리며 내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골목은 와글거리다가 쓸쓸해지고 사라져가지만  영혼속 순수공간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죠.


조덕배의 따뜻한 원곡 외에 임상아의 노래가 무척 슬프죠. 아이유는 귀엽고요. 나문희 배우는 자신 삶을 담아 노래했습니다.


다들, 그들만의 골목길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먼훗날 사전에만 남을 단어,  '골목' 의 이야기 하나, <나의 옛날이야기>입니다.


오늘따라 길 위에 차들이 많이 밀리네요. 잠시 그리운 골목에 내려 쉬어가고 싶어집니다. https://youtu.be/fwucDkRlb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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