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의 속도>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가사만 읽어도 음이 저절로 떠오르는 이 노래는 2001년에 발매된 지오디(GOD)의 '길'입니다. 20년 전 노래지만, 요즘도 인생에 확신이 없을 때면 이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갑자기 웬 노래 이야기냐고요? 다름이 아니라 오늘 소개해드릴 ‘이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지오디의 ‘길’이 줄곧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하염없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여서였을까요? 오늘은 다큐멘터리 영화 <행복의 속도>가 왜 지오디의 ‘길’을 연상케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 11월 11일(목)에 진행된 <행복의 속도> 특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행복의 속도>는 2021년 11월 18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행복의 속도
Speed of Happiness
<행복의 속도>는 일본의 '봇카'라는 직업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봇카(歩荷)는 등에 진 물건을 도보로 운반하는 일본의 옛 직업 중 하나입니다. 운송 수단이 발달하면서 사라진 직업인데요. 일본에는 여전히 봇카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군마, 후쿠시마, 니가타, 도치기에 이르는 4개의 현에 걸쳐있는 오제 국립공원입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넓은 고지대 습원으로, 자연경관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생태계가 엄격히 보존되는 특별보호구역인 만큼, 오제에는 차량이 드나드는 길이 없습니다. 나무판자로 이어진 좁고 기다란 길 하나가 외부와 국립공원 안의 산장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산장에 물건을 운송하는 방법 역시 이 길을 통하는 방법 뿐이죠. 그것이 이곳에 봇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관광객들이 오제의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산장을 방문하는 4월부터 11월까지 봇카는 이곳에서 짐을 나릅니다. 산장 운영에 필요한 제철 식자재부터 맥주통, 가스통 등 안 나르는 물건이 없죠. 지게에 켜켜이 물건을 쌓아 올린 다음, 푹신한 것을 잔뜩 덧댄 어깨끈 사이로 몸을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오직 두 다리의 힘으로 100kg 상당의 짐을 번쩍 들어 올립니다. 신장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짐을 들쳐 멘 봇카는 오제 깊은 곳의 산장으로 물건을 나릅니다. 짧게는 3km 남짓, 길게는 왕복 20km에 이르는 여정이죠. 오제에는 이렇게 산장에 짐을 나르는 베테랑 봇카 6명이 활동 중입니다.
나무판자로 된 길 위를 우직하게 걸으며 짐을 나르는 봇카들. <행복의 속도>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습니다. 봇카는 빠르게 걷지 않습니다.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일정한 속도로 걸어갑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에 여차하면 넘어질 수도 있거든요. 덕분에 그들은 매일 달라지는 오제의 변화를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습니다.
영화는 클로즈업 촬영과 슬로우 모션을 통해 흘리는 땀, 내뱉는 숨, 내리누르는 고통에 비례하여 정직하게 돈을 버는 봇카의 1년을 진솔하게 담아냅니다. 카메라를 통해 어깨가 다 닳아버린 옷과 가방끈 모양대로 짙은 멍이 든 몸, 굳은살로 채워진 발가락을 한참 동안 응시하죠. <행복의 속도>는 이렇게 '봇카'라는 낯선 직업을 따뜻하게 조명합니다.
<행복의 속도>에는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두 명의 봇카가 등장합니다. 20년째 오제에서 짐을 나르며 살아가는 '이가라시'와 봇카를 널리 알리려는 일본청년봇카대 대표 ‘이시타카'가 그들이죠. 같은 봇카인데도 두 사람은 짐을 이는 방식부터 걸음걸이, 가방끈의 모양까지 모두 다릅니다. 봇카라는 직업을 대하는 마음가짐마저요.
‘이가라시’는 자기 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아낍니다. 일주일에 6일을 100kg가 넘는 짐을 이고 걷는데도, 그는 매일 같이 달라지는 오제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으로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의 부인과 어머니는 베테랑 봇카의 삶을 진심으로 격려하고 응원하며, 그의 아들은 아빠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오제를 걷곤 합니다. 가끔은 헬기가 순식간에 냉동 식자재를 산장에 배달하는 모습을 보곤 하지만, 그럴 때도 소박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면 된다고 믿습니다. ‘이가라시’는 그저 오늘도 봇카로서의 자긍심으로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반면, '이시타카'는 사양화되는 봇카라는 직업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평범한 직장인이 아닌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봇카 일을 하면서도 영업 활동에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등산할 때 짐을 대신 들어주는 봇카 이벤트와 같은 활동도 마다하지 않죠. 이처럼 ‘이시타카’는 봇카로 미래를 꿈꾸는 청년입니다.
한 명은 봇카로서의 오늘을 살고, 한 명은 봇카로서의 내일을 준비합니다.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4월이 되면 오제에서 만나 언제나처럼 짐을 이고 걷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것,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걸으며 행복을 찾는다는 점입니다. 남들처럼 빠르게 걷지 않아도, 그들은 충분히 행복을 느낍니다.
언제부턴가 ‘최연소’ 타이틀을 단 영재들이 세상에 많이 보입니다. 남들보다 빨리 무언가를 해낸 사람들이죠. 우리는 그들을 향해 대단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 성취의 속도와 행복의 속도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 목적지엔 일찍 도착할 수 있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느낄 순 없는 것처럼 말이죠.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은 아닙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풍부한 행복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죠. 여기, 오제의 봇카들처럼요. 남들보다 앞서지 않아도 됩니다. 빠르게 달려가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주위에 오제와 같은 천혜의 자연경관은 없더라도 천천히 걷다 보면 분명 그만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지오디의 노래처럼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사람들이 정해진 길을 걷는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천천히 속도에 맞춰 걷다 보면 그것만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 <행복의 속도>입니다.
겨우내 봇카의 발소리는 잠잠해집니다. 12월부터 3월까지 오제의 봄을 기다리며 봇카의 시즌도 잠시 끝이 나거든요. 지난 2020년 초부터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19 생각이 문득 났습니다. 과연 6명의 베테랑 봇카들은 지금도 계속 봇카의 일을 이어가고 있을까요? 부디 오제를 누비는 봇카들의 ‘행복의 속도’가 지금도 여전하기를 바라봅니다.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 (출처: 씨네21)
감독: 박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