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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까 Apr 30. 2022

로봇이라고 꼭 인간이 되고 싶은 건 아니야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애프터 양>

SF 장르의 매력에 빠진 건 김초엽 작가의 소설 덕분이었습니다.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을 읽고, 근미래에 펼쳐질지도 모를 세상을 미리 엿보는 묘한 기분을 느꼈죠. 오직 과학적 상상력만이 써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걸 그전엔 몰랐습니다.


그런데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마침 요즘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SF 장르라는 겁니다. 9일간의 영화제 일정 중 굳이 개막식 참석을 선택한 것도 이 작품을 전주 돔의 웅장한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하고 싶었기 때문인데요. 아니나 다를까, 저는 <애프터 양>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애프터 양
After Yang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양’과 함께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백인 남성, 흑인 여성, 동양인 아이, 그리고 동양인의 얼굴을 한 테크노 사피엔스로 구성된, 사회가 ‘정상성’을 부여하는 가족의 형태와는 거리가 먼 4인 가족이죠. 극 중에서는 ‘양’을 안드로이드 대신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기에, 앞으로는 저도 그를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지칭하겠습니다.


‘다름’에서 시작한 이 가족은 ‘평범’을 추구하는 여느 가족보다 대단하고 멋집니다. 입양한 아이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아시아계 테크노 사피엔스를 데려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양’이 작동을 멈춥니다. 원작(단편소설 <Saying Goodbye to Yang>)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실 이 작품의 더 정확한 줄거리는 ‘테크노 사피엔스 ‘양’과 이별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양’을 고치려고 동분서주하던 아빠 ‘제이크’는 ‘양’이 다른 테크노 사피엔스와 달리 기억 저장 장치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크노 사피엔스 전문가는 ‘제이크’에게 ‘양’의 기억을 확인한 다음, 연구 가치가 있는 ‘양’과 그의 기억을 넘겨달라고 부탁하죠. 판독기를 통해 ‘양’의 사적인 기억을 살피던 ‘제이크’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딸 ‘미카’는 아빠에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제이크’는 “Just a documentary.”라고 답하는데요. 맞습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양’의 시선에서 기록(document)된 일상일 뿐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차량의 블랙박스와도 같죠. 그럼 도대체 무엇이 ‘제이크’를 혼란스럽게 한 걸까요?


그것은 바로 로봇답지 않은 ‘양’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의 기억 장치에는 마치 인간의 추억과 같은 것들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연인처럼 보이는 한 여인, 인상적인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옷, 그 여인과 함께 들었던 노래 같은 것들이었죠. ‘인간이 아닌 존재’인 테크노 사피엔스가 인간처럼 기억하고, 행동하고, 심지어는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말해 ‘양’의 인간다움이 그를 혼란스럽게 한 겁니다. ‘제이크’는 고민합니다. ‘양’은 인간이 되고 싶었던 걸까?




영화는 이 지점에서 관객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이 아닌 존재’는 모두 인간이 되고 싶어 할까? 정체성에 관한 물음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저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로봇의 이야기, 그런 로봇을 안쓰러워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었는지요. 인간과 로봇을 각각 다수자와 소수자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성애자가 성소수자에게 “이성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슬프지?”라고 묻거나,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나처럼 살고 싶지?”라고 묻는 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선을 넘는 질문이니까요.


물론 ‘양’은 때때로 인간의 삶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행복한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 입양 아동인 동생 ‘미카’의 뿌리를 찾아주기 위해 고민하며, 무가 있어야 유가 존재한다(There’s no something without nothing)는 꽤나 분명한 가치관까지 갖고 있죠. 그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고 물으면, ‘양’은 그저 이렇게 답합니다. “아마도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닐까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사회도 소수자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저 애초에 프로그래밍된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이에요.




로봇과 인간으로 ‘다름’을 이야기하는 <애프터 양> 덕분에 인간 중심적 사고, 다수 중심적 사고를 조금은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양’을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테크노 사피엔스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들을 호모 사피엔스와 같이 또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본 것이죠.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관객들은 아름답고 시적이며 따뜻한 SF 영화에 뜨거운 박수를 보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집행부가 이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정하는 데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은 이유를 너무나도 명백히 알 수 있었던 작품, <애프터 양>이었습니다.


Summary 

진보한 기술이 일상에 스며든 가까운 미래, 제이크 가족 소유의 안드로이드 ‘양’은 아시아계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입양한 딸 ‘미카’의 보호자 역할은 물론 그녀의 문화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형제인 셈이다. 어느 날 ‘양’이 갑작스레 작동을 멈춘다. ‘양’을 고치기 위해 여러 곳을 오가던 ‘제이크’는 양에게 기억을 저장하는 특별한 기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양’의 기억 데이터를 탐험하기 시작한 ‘제이크’는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안드로이드 ‘양’의 사적인 시간들을 발견하기 시작하는데…. ‘양’은 과연 인간이 되고 싶어 한 걸까?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Cast 

감독: 코고나다
출연: 저스틴 H. 민, 콜린 패럴, 조디 터너스미스, 말레아 엠마 찬드라위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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