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스트 도터>
자고로 조금은 부족하고, 조금은 미숙한 것이 '처음'입니다. 제가 지나온 몇몇의 '처음' 역시 떠올려보면 모두 부족함과 미숙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처음'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순간을 겪었습니다. 매기 질렌할 감독의 '처음'을 감상한 후의 일이었죠.
매기 질렌할 감독의 데뷔작을 보고 나면 부족함보다는 만족감을, 미숙함보다는 원숙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각본상을 시작으로, 영화계도 그녀의 '처음'에 무한한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디 있다가 이제서야 나타나셨나요?"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매기 질렌할 감독의 데뷔작 <로스트 도터>입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6월 30일(목)에 진행된 <로스트 도터>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로스트 도터>는 2022년 7월 14일 국내 개봉 예정작입니다.
로스트 도터
The Lost Daughter
<로스트 도터>의 주인공은 '레다'와 '니나'입니다. '레다'는 중년의 대학교수이자 성인이 된 두 딸의 엄마입니다. '니나'는 '레다'가 휴가 차 방문한 그리스에 머무르며, 어린 딸 '엘레나'를 키우고 있는 젊은 여성이죠. '레다'는 젊은 엄마 '니나'를 바라볼 때마다 자꾸만 자신의 옛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변에서 '엘레나'가 사라지고 '니나'와 가족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그녀를 찾습니다. 다행히도 '엘레나'는 금방 돌아왔지만, 대신 '엘레나'가 분신처럼 여기던 인형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죠. 알고 보니 아이의 인형을 훔친 것은 '레다'였고, 그녀는 훔친 인형과 함께 지내며 지난 기억들을 마주합니다.
우리 사회는 위대함, 숭고함, 희생, 헌신 따위의 말로 '엄마'라는 존재를 추앙합니다. 좋게 말해 추앙이지, 실은 강요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자아는 모두 숨기고, '엄마'라는 코르셋을 꽉 조이기를 요구하죠. 그 과정에서 인간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자식의 편안한 의식주를 책임지는 사람, 자식을 심리적・사회적으로 훌륭하게 키워내는 사람,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일보다는 자식의 일에 집중하는 사람. '-하는 사람'이라고 일컬었지만 이 모든 일들을 그저 행복하게 해내야만 '엄마다운 엄마'라면, 사회가 생각하는 엄마는 사람이 아닌 기계가 분명합니다.
<로스트 도터>는 '레다'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해 보여주면서 이처럼 거룩한 단어들로 포장된 엄마의 전형성을 깨부숩니다.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에 대하여'라는 포스터 속 문구만으로도 영화가 말하려는 주제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지 않고 희생하지 않는 엄마. 소리 내 읽어보면 이렇게 낯설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사실이 기울어진 사회 통념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언제나 신비하면서도 부끄럽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드럽게' 말 안 듣는 딸들은 전형성을 깨부수는 과정에서 톡톡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죄송합니다. '드럽게'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쓸 말이 없었습니다.) 젊은 '레다'의 7살, 5살 난 딸들도 그렇고, '니나'의 딸 '엘레나'도 그렇습니다. 엄마를 괴롭히는 게 제 삶의 의미인 양, 쉴 새 없이 엄마를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괴롭힙니다. '어렸을 때 나도 저랬을까?' 싶어 속으로 반성하게 될 정도입니다. 미디어에서는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을 대체로 해맑고 순진무구한 동심 정도로 포장합니다. 피로가 가득 쌓인 얼굴보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마는 얼굴에 초점을 맞추곤 하죠.
하지만 <로스트 도터>는 다릅니다. 한계치에 도달한 엄마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담습니다. 아이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귀찮아 하죠. '니나'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지고, '레다'는 심지어 아이를 버리고 집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레다'가 '엘레나'의 인형을 몰래 훔치는 것도 엄마의 전형성을 지워버리는 장면입니다. 아이가 엄마의 물건에 손대는 장면은 많지만, 엄마가 아이의 물건에 손대는 장면은 없으니까요. 한 마디로 너희(딸)도 힘들어 보라고 장난 좀 쳐본 겁니다. '엄마다운 엄마'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천한 것이죠. 아이로 인해 우울증, 무기력증에 빠졌으면서도 딸을 잃어버리자 백방으로 아이를 찾아다니는 엄마의 본능에 분개해 저지른 일일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든 우리에게 익숙한 엄마의 모습은 없습니다.
<로스트 도터>는 모성애의 이면을 그린 다른 작품들처럼 '결국 모성을 되찾고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엄마'를 그리지 않습니다. <로스트 도터>의 엄마들은 '엄마다운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끝까지 자책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으며,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모성을 잃은 적이 없거든요. 엄마답지 않은 엄마처럼 그려지는 '레다'도 분명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입니다. 엄마의 역할을 버거워하면서도 아이들과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아이들이 찾아준 자신의 특징을 사랑하는 인물이죠. 영화는 이렇게 '엄마다운 엄마'가 허상임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는 '엄마'라는 정체성을 떠맡고, '엄마다운 엄마'로 거듭나지 못해 좌절하는 '레다'와 '니나'가 얼마나 많을까요? 젊은 '레다'를 연기한 배우 제시 버클리는 "이 작품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여러 부분을 변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감독의 메시지는 역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변명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충분히 '엄마다운 엄마'입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제목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로스트 도터> 역시 해변에서 딸을 잃어버리는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고, '엘레나'가 소중히 여기던 인형을 잃어버린 것을 지칭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길잃은 '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딸'로 태어나야만 '엄마'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특히 응시가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레다'의 시선 끝에는 '니나'가 있고, 젊은 '레다'의 시선 끝에는 아이들이 없죠.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엄마'가 되어보지 않았더라도 미약하게나마 '엄마'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들의 심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규정한 모성애에 관한 의구심을 품어본 적 있다면, <로스트 도터>를 추천합니다.
“집을 나왔어요. 그렇게 딸들을 버렸죠”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는 딸을 가진 젊은 여자 니나를 보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일 같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갑자기 니나의 딸이 사라지고 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 (출처: 씨네21)
감독: 매기 질렌할
출연: 올리비아 콜맨, 다코다 존슨, 제시 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