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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자까 Apr 23. 2023

우울을 이겨낼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서

드라마 <성난 사람들>

나도 모르게 울화통이 치미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일기를 쓰다가 펜을 놓치며 일기장에 ‘주욱-’ 못난 선 하나가 그어졌을 때, 단전에서부터 차오르는 분노를 느꼈죠. “아, 진짜 되는 일 없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선 하나, 수정 테이프로 가려버리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요? 그날은 유독 원고가 잘 안 풀리는 하루이긴 했습니다. 아무리 공 들여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업무 메일에 커피 한 잔 즐기지 못한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도어칸에 있던 소스통이 갑자기 발등 위로 떨어진 날이기도 했죠. 결국 발등에는 시퍼런 멍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괜찮았습니다. 일기를 쓰며 고단했던 하루를 잘 보내주면 되니까요. 그런데 하필 이런 날, ‘주욱-’이라니요. 그렇게 못난 선 하나는 제 마음속 분노를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 저처럼 사소한 일로 분노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버린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가벼운 경적 소리 하나때문에 분노혈전을 펼치는 <성난 사람들> 속 ‘대니’와 ‘에이미’입니다. 그들은 왜 화를 참지 못했을까요? 그리고 저는 왜 화를 참지 못했을까요? 분노의 도화선 끝에 감춰진 진실을 살피는 드라마 <성난 사람들>에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성난 사람들
Beef

‘대니’와 ‘에이미’는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이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같지 않습니다. ‘대니’는 보수를 받고 고객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도급업자입니다. 가족에게 사기당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다시 미국으로 모셔오길 원하죠. 한편, ‘에이미’는 자신을 돈방석에 앉혀줄 브랜드 매각을 앞둔 사업가입니다. 힘들었던 지난날은 잊고, 가족에게 집중하며 쉬는 게 그녀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아시아인이라는 것 외에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속에 차오르는 분노를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죠. 돈을 모으기는커녕 자꾸만 일이 꼬이는 ‘대니’와 더디게 흘러가는 인수 논의에 진이 빠지는 ’에이미’. 그들은 다른 처지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불행과 분노를 품고 삽니다. 그런 두 사람이 하필 도로 위에서 마주친 겁니다. 이성을 잃은 그들은 난폭 운전, 욕설, 쓰레기 투척 등 위험천만한 보복 운전으로 서로에게 증오를 퍼붓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터져나갑니다. 상대방의 자동차에 모욕적인 낙서를 하고, 수리공으로 위장해 집에 오줌을 휘갈기고 도망치기도 하죠. 점점 더 유치해지는 그들의 싸움은 분명 우습습니다. 그런데 언뜻 약간의 희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대인이라면 상대방에게 무턱대고 화내기보다는 화를 참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마치 쌓인 감정을 풀기 위해 물건을 마구 부술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방을 찾듯이, 서로에게 분노를 마구 표출하는 그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죠.




<성난 사람들>은 우스움과 희열을 선사하는 한편, 시청자에게 조심스럽게 한 가지 질문도 던집니다.


“도대체 ‘대니’와 ‘에이미’는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걸까요?”


<성난 사람들>은 9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답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10화에 이르러 ‘대니’와 ‘에이미‘의 분노의 근원을 밝혀냅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연극처럼 ‘대니‘와 ’에이미‘가 주고받는 대화로 가득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분노 뒤에 숨겨진 불행, 비관, 혐오 그리고 우울을 조금씩 들춰내죠. ‘대니’와 ‘에이미‘는 자신들조차 알지 못했던 상처를 나와 비슷한 상대의 아픔을 거쳐 들여다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근원에 있던 우울 한꺼풀을 걷어내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성난 사람들>이라는 제목과 시놉시스는 ‘악인 대 악인’의 구조를 상상하게 합니다. 쾌감을 자극하는 갖은 분노 표출 대결 한바탕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불러 일으키죠. 저 역시 긴장과 호기심을 안고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남는 감정은 쾌감보다는 연민과 공감입니다. 성난 사람들의 분노의 도화선 끝에는 무시무시한 악마가 아니라 오랜 시간 울고 있던 아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성난 사람들>은 휴먼 드라마로 막을 내립니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별 소제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작품에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이성진 작가가 캐릭터와 스토리를 묘사하기 위해 여러 예술작품에서 차용한 문장들이라고 하는데요. 드라마를 모두 감상한 후에 소제목을 다시 한번 훑어보면, <성난 사람들>의 캐릭터와 스토리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새들은 노래하는 게 아니야, 고통에 울부짖는 거지(1화)‘, ’내 속엔 울음이 산다(3화)‘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되돌아보면, 서론에서 밝혔던 저의 분노 역시 여유 없는 삶의 고통과 우울에서 비롯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또한 <성난 사람들>은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비한국 작품 중에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문화와 언어를 대충 가져다 써서 황당한 웃음을 유발하는 보통의 비한국 작품들과 달리, 가족주의를 비롯한 우리나라만의 정서를 무척 잘 그려내죠. 이는 <성난 사람들>을 만든 제작진과 배우 대부분이 한국계로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유독 일이 꼬이는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분노에 관한 의미 있는 고찰과 다양한 실력파 한국계 배우 및 제작진의 활약까지 경험할 수 있는 작품, <성난 사람들>과 함께해보는 건 어떨까요? 분명 어떠한 종류의 답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Summary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도급업자와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사업가. 두 사람 사이에서 난폭 운전 사건이 벌어지면서 내면의 어두운 분노를 자극하는 갈등이 촉발된다. (출처: 넷플릭스)


Cast

제작: 이성진
출연: 스티븐 연, 앨리 웡, 영 마지노, 데이비드 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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