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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기린 Apr 30. 2023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

기억하는 일을 분담하는 것

함께 전시보는 게 참 좋아


영화소개 프로그램에서 [극한직업]에 대해 리뷰를 하고 있었다. 주요한 클립만 모아서 보여주니 몇 차례 본 영화여도 또 재미있었다.


- 우리 이거 장인장모님이랑 같이 극장에서 봤었잖아

- 엥? 진짜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 그 이벤트를 계획한 건 나였을 거다. 모두가 만족스러울 영화를 찾는 것부터 함께 영화를 보기 좋은 장소, 시간대까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진행했을 거다. 그런데도 일절 아무 기억이 없다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런 일은 종종 있다. 내가 기억하는 걸 남편이 까맣게 모를 때도 있고 남편이 불쑥 끄집어내는 어떤 사건에 마치 나는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생소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중요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상관없이 영화소개처럼, 특정 클립만 머릿속에 부유한다. 그마저도 자주 상기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의 지평선으로 넘어가버리는 것 같다. 이건 나에게 살짝 공포의 영역이다.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건 나'라는 말이 있지만 나의 과거가 나조차도 어색할 때 괜스레 스스로에게 미안하면서도 애석한 느낌이 든다. 특이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지의 미래보다 미궁의 과거가 나는 더 두렵다.




정리하지 않은 옷장의 문을 여는 것처럼 콘텍스트가 연결되지 않는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더듬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결국 다시 닫아두고 외면한다. 그럴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면 정말 고맙겠지.


- 네가 좋아하던 옷 여기 있네!

- 너한테 이런 옷도 있는 거 알고 있니?


많은 경우에 그런 역할을 해주는 건 남편이다.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이니, 공유하고 있는 기억도 많고 각자 다른 시각에서 입력한 정보를 분류해 두는 방식도 다르기에 가능한.


최근에 집을 리모델링했다. 10년 산 집, 미련 없이 이사 갈 수도 있었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다르게 부동산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리 집을 보러 오는 사람도 없었고 우리가 살 수 있는 집도 발견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리모델링이지만 생각보다 대대적인 공사가 되었고 보관이사를 했기에 짐을 다시 정리하는 과정도 여느 이사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반강제로 집정리를 하면서 한 번도 못 봤던 남편의 추억꾸러미를 찾았다. 군대에서 받은 편지, 학위증, 드물게 그 시절의 남편 사진. 몇몇 가지를 살펴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는 일이 '한 사람의 우주를 품는 일'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구나. 이 사람에게는 나와 공유하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도 존재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머리를 훅 때리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애정하는 친구로, 사랑하는 아들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로 살던 남편의 그 시절에 나는 없었지만 분명히 그때의 그는 반짝반짝 빛났을 거다. 겪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나의 과거는 처량하지만 보지 못한 그의 과거는 신비로웠다.




소중하게 대해야겠다. 내가 그랬듯이 모든 순간 의미 있고 아름다운 기억 한 땀 한 땀을 엮어 만들어진 인격을 가진 이 사람을. 내가 공유한 시간들로만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억을 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같은 일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니까 의견이 다를 때 이 부분을 고려해서 조금 덜 서운해해야겠다. 인생의 가장 큰 변환기에 만난 두 사람도 이런데 부모님과는 어떨까. 나를 낳기 전의 시간들, 내가 인지가 생기기 전의 시간들. 떨어져 살게 된 이후의 시간들. 나는 아마 평생 부모님의 본연의 모습은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겠지. 알량하게 부모님을 챙겨드린답시고 선심 쓰듯 쓴 시간들의 단편에 기대어 고작 그분들의 취향 정도만 파악해 놓고 '우리 엄만 이거 싫어해, 우리 아빤 이거 좋아해. 내가 잘 알지'라며 위안하는 게 자식의 한계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함께한 시간을 더 오래 더 자세하게 기억하고 곱씹어서 하나하나 귀하게 간직해야지. 남편이 나에게 그래주듯이 나도 남편에게, 부모님에게 그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한 번씩 꺼내 보여줄 수 있도록.


내 곁에서 미궁의 과거 속에 헤매는 나를 미지의 미래에 대한 기대로 이끌어주는 모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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