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올래요?
잠깐 인턴십을 했던 회사에서 함께 일하던 언니로부터 카톡 메세지를 받았다. 베를린으로 이직하게 된 언니가 회사에 공석이 났다며 연락을 해 온 것이었다. 독일, 베를린...? 유럽 배낭여행 시절 잠시 들러 반나절을 보냈을 뿐인 베를린이라니, 어쩐지 생뚱맞은 목적지였다.
친구들은 석사를 마치는 나이에 겨우 학사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오는 자소서를 쓰느라 머리에 쥐가 났었다. 그러면서도 나만큼 취준생 라이프를 즐기는 사람도 드물었는데, 평일 낮에 한가롭게 공원을 거닐거나 신세한탄을 빙자로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을 만나 쉴 새 없이 수다를 떠는 등 취준생 본연의 신분을 잊은 채 결코 우울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갑작스럽게 온 인터뷰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다. 일주일만에 두 차례 인터뷰를 보고 합격 통보를 받자 그때서야 베를린행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취업을 했다는 사실이, 더군다나 스페인 교환학생 시절 이후 항상 그리워했던 유럽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뻤다. 반면 나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친구들이나 많이 의지하고 좋아했던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를 비롯해, 특히 엄마가 돌아가신 이후로 더 똘똘 뭉쳐 지내던 아빠와 동생으로부터 멀리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수시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렇게 어쩌다 베를린에 온 지 벌써 햇수로 사년 차가 되었다. 아직도 독일어는 까막눈 수준이지만 읽기도 어려운 거리 이름이나 역 이름 때문에 길을 잃기 일쑤였던 초반과는 달리 베를린 구석구석 구글맵 없이도 잘 찾아 다닌다.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집을 드나드는 가족같은 친구들도 생겼고, 길에서 만나면 안부를 주고 받는 단골 카페나 식당 주인들도 있다. 영 햇빛을 보기 어려운 날이 계속되는 날씨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기에 주로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따뜻한 남쪽 나라로 여행을 간다. 그리고 베를린 공항에 돌아오는 순간 비로소 집에 왔다는 생각을 한다.
현재 나의 신분은 다시 취준생이다. 다만 일산에서 베를린으로 좌표가 바뀌었다. 눈 앞의 풍경이 호수공원에서 슈프레강으로 달라졌고, 맥주를 마시며 싱거운 농담을 주고 받는 친구들의 국적이 다양해졌다. 무엇보다 삼 년이라는 경력이 생겼고 더 이상 아빠 주머니를 털어 용돈을 받지 않아도 되는 금전적인 여유도 생겼다. 어느 정도 능력치도 쌓았으니 이번에는 이런 저런 기회를 직접 찾아 나서 보자는 생각을 한다. 모처럼 주어진 취준생으로서의 시기를 신나게, 또 알차게 보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