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힐린 Aug 25. 2020

여름을 맞이하는 나만의 방법: 그날의 소바

커버 이미지 Photo by Masaaki Komori on Unsplash


채널예스 [나도, 에세이스트] 8월 가작 수상작입니다.


해마다 점점 더워지는 베를린의 여름. 지난 주에 벌써 30도를 찍더니 동남아 날씨 마냥 푹푹찌는 습한 날씨가 이어졌다. 습기를 얻었지만 시원하게 쏟아진 소나기 덕에 꽃가루가 잦아든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요즘 같은 시국에 쉼 없이 재채기를 해 온 탓에 주변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자연스레 떠오르는 음식이 있었다. 나의 여름 소울 푸드 소바였다. 


‘이건 3인분 양에 2유로, 이건 480g에 4.3유로… 뭐가 싼 거지?’ 뙤약볕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들린 아시안마트에서 어떤 소바 면을 살 것인지 머리를 굴렸다. 딱히 계산이 나오지 않아 포장이 좀 더 예쁜 것으로 골랐다. 쯔유는 진열되어 있는 상품이 하나 뿐이라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파랑 무, 와사비는 집에 있으니까…’ 계산대로 가니 자주 와서 얼굴을 익힌 베트남 사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슌 탁(좋은 하루)”하고 인사를 건네셨다.


소바를 처음 먹어본다는 아직 젓가락질도 서툰 애인 몫까지 이인분의 소바를 만들기로 했다. 약간의 정성이 더 필요한 내 취향의 탱글탱글하고 쫀득한 면을 위해 한소끔 끓어오르는 냄비를 계속 곁눈질 하며 치즈 그라인더에 열심히 무를 갈았다. 갈아놓은 무에서 알싸한 향이 올라와 벌써부터 시원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탱탱하게 삶아진 면을 체에 받쳐 찬 물에 헹구어 준 후, 쯔유 국물에 퐁당 떨어뜨리고, 슥슥 자른 김을 얹고, 코 끝을 살짝 찡하게 할 정도의 양의 파와 와사비를 국물에 넣어줬다. 얼음 몇 개까지 동동 띄워주니 15분도 걸리지 않아 소바가 완성되었다. 쯔유 소스에 충분히 적셔진 소바 면이 입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새삼 다시 여름이 왔음을 느낀다. 애인은 이처럼 맛있는 걸 이제서야 맛보는 게 억울하다며 국물이 튀든 말든 후루룩 면치기를 했다. 


어쩌다 나의 여름 소울 푸드는 냉면도 콩국수도 아닌 소바가 되었을까. 언제 처음으로 소바를 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에서는 소바를 먹었다. 일본에 사는 외갓집 식구들로부터 이런 저런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인지 엄마는 여름이 되면 종종 소바를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대단한 요리 실력을 가지진 않았던 엄마에게도 소바는 비교적 만들기 쉬운 메뉴였을 것이다. 엄마는 ‘일본어를 더 배워둘걸…’ 혹은 ‘너는 꼭 나중에 외국에 나가서 살아보렴.’ 등의 말을 내게 종종 하곤 했다. 


하루는 엄마가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이촌동에 데려간 적이 있다. 우리가 간 곳은 엄마가 신문에서 본 한 일본인 할아버지가 몇 십년 째 해오셨다는 한 지하 상가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귀에 에어팟을 끼고 에어팟을 찾아 다닐 정도로 잘 깜빡하는 내가 이십년도 더 된 그 날은 아주 선명히 기억한다. 새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요리를 하던 일본인 할아버지, 정갈하게 나온 소바와 냉녹차, 그리고 지하 상가 밖 길가에 나란히 위치해 있던 예쁜 소품 가게들. 우리 셋이 손을 잡고 걸었던 그 날도 코 끝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히던 여름 날이었다.


수 개월째 재택 근무를 하는 덕에 요즘은 거의 매일 점심 시간마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비디오 콜을 한다. 매번 내가 무엇을 먹는지 궁금해 하는 아빠는 역시나 “오늘은 또 뭐를 먹니?”라고 물어온다. “응, 후딱 소바 만들어서 먹고 있지.” 나는 나를 비추던 휴대폰 카메라 화면을 돌려 테이블 위의 소바를 보여 준다. 아빠는 영양가가 부족한 거 아니냐며 더 잘 챙겨 먹으라고 언제나처럼 내 건강 걱정 뿐이다. 내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올리브 색으로 발톱을 칠하던 동생은 30도라 더워 죽겠다며 툴툴대며 선풍기를 자기 쪽으로 잡아 끈다. 나는 와사비를 젓가락으로 조금 더 집어 국물에 풀며 생각한다. ‘아빠에게도 내게 소바와 같은 음식이 있겠지. 동생은 그 날 이촌동의 더위를 기억하고 있을까? 엄마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엄마 말대로 외국에 살고 있는 나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을까? ’


폭염에도 마스크를 쓰고 길을 걷는 이들, 목빠지게 기다리던 여름 휴가가 취소되어 아쉬워하는 직장인들, ‘Vorübergehend geschlossen(임시 휴업)’ 팻말이 붙은 상점들… 올해 여름은 우리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살짝 다른 풍경의 여름이 될 듯 하다. 그렇기에, 혹은 그럼에도, 모든 이들이 더 건강하게, 즐겁게, 많이 웃으며 올 여름을 나기를 바라본다. 나는 그래서 오늘도 소바 면을 쟁이러 아시안마트로 향한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취준생이 되었다, 베를린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