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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4. 2024

근로자의 날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45일 차, 20200501

2012년 근로자의 날.

함부르크 Landungsbrücke에 위치한 스웨덴 교회 앞에 여러 가지 크기와 종류의 깃발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차도를 따라 걸어간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인턴 근무를 하고 있던 나는 함부르크에 있는 친구들을 보기 위해서 함부르크에 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노동절 시위 풍경. 태어나서 처음 보는 외국의 시위 장면이었다.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 넘치는 행진은 시위라기보다는 하나의 축제같이 보였다. 20대 중반의 나에게 독일 문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 인상 깊은 모습이었다. 시위도 축제가 될 수 있구나. 


2018년 근로자의 날. 

친한 이태리 친구가 베를린으로 놀러 와서 오랜만에 만났다. 상점이 다 닫힌 베를린 Kreuzberg의 거리를 거닐며 길거리에서 나오는 음악과 가판대에서 파는 음료를 즐기며 정처 없이 술을 마시고 웃고 춤추며 하루를 즐겼다. 

아침에 시작해서 새벽까지 이어진 파티를 온 힘과 열정을 다해 즐기고 아직 스스로 늙지 않았다고 위로하며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20대 중반에 서로 나눈 추억을 현실로 불러일으켰다. 

뜨거웠던 파티의 열기만큼 여름을 방불케 하는 강한 햇살이 아직도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2020년 근로자의 날.

나지막이 일어났다. 방 안이 밝아졌는데 몇 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분명 햇살이 가득 비치는 나날들이 이어지는데 티셔츠에 패딩조끼와 깔갈이 양말까지 신고 자고 일어났는데도 코가 가득 막히고 재채기가 나온다. 

토마토를 잘라서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따뜻하게 데워서 과일을 어설프게 추가해서 올리브기름과 발사믹 식초에 비벼 아심(아침 겸 점심)을 먹고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할지 생각한다. 

읽고 싶었던 새로운 책도 생각나고, 최근 계속 읽던 책을 읽을지 아니면 원피스를 이어서 볼지. 지난밤 한국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인스타그램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정오가 훨씬 지났다.

먹는 일이 하루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게으름이 가득한 마음에는 식사조차 번거로운 일이라 건너뛰고 싶지만 배고픔이 재촉하는 식욕이 야속하다. 

인스타그램에 나오는 친구들의 음식이나 음료를 보다 보면 인스타그램이 의도한 상술에 아주 잘 휘말려서 나의 식사들이 상당한 수준으로 허접해 보인다. 


오늘도 아무 내용 없이 하루가 마감된다. 

지나치게 한적한 근로자의 날 휴일에서 지나치게 바쁘고 활기찼던 지난 근로자의 날이 생각난다. 

한적함과 번잡함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는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득 한적함이 주는 여유가 감사하다.

힘이 빠졌던 지난주에 비해 아무 상황도 바뀌지 않았다. 집을 구하지 못한 것은 여전하고, 혼자 지내는 상황도 여전하고, 출근을 못하는 상황도, 근무 시간만큼 급여도 단축된 상항도 동일하다. 

그래도 마음속에 심어진 작은 씨앗이 발화되어 풍기는 은은한 향기가 지나친 한적함에 가득 차서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희망을 건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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