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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릐 Jan 25. 2024

평범을 일상에 묻혀가는

100일간의 코로나 일기 46일 차, 20200502

작가의 머릿속에 등장인물들이 나타나면 작가는 그 인물들이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를 그냥 옮기기만 한다고 한다. 

작가는 이야기를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부여된 등장인물이 성격과 상황에 맞게 살아가는 모습을 옮길 뿐인 것이고 또 그 이야기들을 적어 옮겨야 하는 의무감을 강하게 받는다고도 한다. 

누군가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이를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나 모든 작가들이 같은 과정으로 이야기를 적어나가는지는 모르겠다. 


한국에서 자란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라면 어릴 적 학교 숙제로 혹은 부모님의 권유로 일기를 써봤을 것이다. 내 기억을 더듬어보면 항상 날씨, 음식, 다짐 등 굉장히 간략한 그 하루의 정보를 적는데 그쳤다. 반면에 어떤 친구들은 그림도 그리고 하루를 상세하게 묘사하며 빼곡하게 일기장을 채우기도 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그런데 숙제를 안 해서 엄마에게 혼났다. 나중엔 숙제를 잘해야겠다. 끝! 


이런 식의 일기도 쓰기가 귀찮아서 방학이 끝나갈 때쯤 방학치 일기를 며칠에 몰아서 쓰던 기억도 난다. 기억도 안나는 나날들을 나의 허구에 맡긴 채, 아무도 이 허구는 확인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희미한 그 나날들의 날씨와 그날의 일과 감정과 다짐을 적어나갔다.


20여 년도 더 흐른 지금, 자발적으로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나중에 이 글을 본다 해도 하루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 만큼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닌 실제 일어난 감정을 중심으로 글을 적는다. 

굳이 오늘이 아니더라도 적을 수 있는 글처럼 보이지만, 오늘이 지나면 증발해 버릴 감정이 비록 한 없이 부정적일지라도 담아두고 싶어서. 

나는 본래부터 이야기 꾼의 기질은 없다. 있었던 일은 그냥 결과부터 말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시시한 이야기로 전락시키는 나의 스토리텔링 실력은 굳이 더 말하지 않아도 내 모든 지인들이 알고 있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느끼고 있다. 


나는 이야기가 아닌 감정을 말하고 싶다.

작가들의 머릿속 등장인물들이 한없이 발설하는 이야기처럼, 우리 각자의 마음과 머릿속에 한 없이 발설하는 감정을 한 움큼 한 움큼 조심스레 꺼내어 표현하고 싶다.

꼭 남들처럼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나의 감정은 그만큼 아플 수 있고, 

처절하게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연이 아니더라도 나의 감정은 그만큼 슬프고 안쓰러울 수 있고, 

꼭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성공신화가 아니더라도 나의 감정은 가슴 벅차고 자랑스러울 수 있고, 

모두가 공감할만한 고생스러운 역경이 아니더라도 나의 감정은 힘들고 지쳐있을 수 있고,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우울할 수 있다.


평범을 일상에 묻혀가는 우리 모두의 감정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함 하나 없는 평범함을 말하고 싶다. 

스토리텔러는 못되지만 이모션텔러는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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