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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처럼 Aug 14. 2021

자네 꼭 그래야만 했는가?

. 헤세에게 쓰는 편지 NO.6, 수레바퀴 아래서를읽고(스포 주의)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중략) 이 시커먼 교실 안에서 내 젊음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워. (중략) 왜 바꾸지 않고 맘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강렬한 비트에 파격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 노래는 '교실 이데아'라는 노래일세. 내가 고등학생일 때, 유행했던 노래이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했었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강하게 던지는 사람은 없었네. 그리고 이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경우도 없었지. 그래서 난 '아, 내가 선생님이 될 때 즈음에는 이런 사회가 아닌 다른 사회로 바뀌어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었지. 지금 생각하면 난 참 순수한 아니 순진한 학생이었네. 어쨌든 그런 희망을 가슴에 품고 선생님이 되었지. 그리고 아빠도 되었네.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바뀐 것은 없었네. 조금 유연해진 듯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결국 목적은 같았네. 서울대에 몇 명을 보냈는가? 상위권 대학에 얼마나 많은 학생을 보냈는가? 4년제는? 전문대는? 이것이 목표였지.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네. 아니 수많은 변화의 몸부림을 쳐봐도 결국 대입이라는 암묵적인 올가미는 그 자리에 다리를 깊숙이 박고 꿈쩍도 하지 않았지. 그 속에서 교육자라는 양심이 서 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네. 사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세. 그 속에서 열심히 하는 교사들도 아주 많다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네. 고3 담임을 몇 년을 연속으로 하다 보니 점점 소중한 것을 잃어갔네. 


학생들을 있는 그대로, 한 명 한 명 바라보아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네. 처음에는 학생들의 꿈과 희망이 우선이었고, 학생의 내면을 보려고 했으며, 대학(성적)은 그다음이었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순서가 뒤바뀌었네. 학생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이름 옆에 있는 성적을 먼저 보았네. 학생을 보면 숫자가 먼저 떠올랐고, 그 숫자로 진학 가능한 대학이 떠올랐지. 학생의 꿈과 희망은 마지막 고려사항이 되었네. 예전에는 "그래 거기 가고 싶으면 공부를 더 해야 돼"라고 말을 했었다면, "이 성적으로는 거기 가기 힘들 것 같은데, 다른 건 어떨까?"라고 말을 하게 되었네. 고3 담임을 5년째 하던 해, 학생들의 미래를 숫자로 한 순간에 판단해버리는 내게 스스로 환멸을 강하게 느꼈네. 내가 왜 교사가 되려고 했었는지, 그 이유는 잊어버렸고. 하루하루 무의미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네. 나는 그때 내가 지쳤다는 것을 알았지. 


육아휴직을 핑계로 난 그곳에서 잠시나마 도망쳐 나올 수 있었네. 물론 육아휴직은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꼭 하려고 했던 것이긴 하네만, 그 해에 그렇게 지치지 않았더라면 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휴직을 할 수 있었겠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난 그때 도망쳐 나왔다는 생각이 더 강하네. 수레바퀴 아래서 바둥대다가 잠시 옆으로 빠져나왔다고 하면 될 것 같네. 그때 자네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게 되었네.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팠다네. 자네는 '선생'을 그리고 '공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했지. 자네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나를 그대로 공격했네.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살이 되어서 나를 찔렀네. 왜냐하면, 한스의 자유를 빼앗고, 그렇게 몰아붙이고, 끝내는 방치한 아버지의 모습, 목사의 모습,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내 안에서 보았기 때문일세. 교장선생님이 한스에게 한 '열심히 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에 깔리게 되거든'이라는 말과 '공부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못 간다"라고 내가 학생들에게 한 말과 무엇이 다르겠나. 


누가 더 상대방 때문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게 되는가! 선생이 학생 때문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학생이 선생 때문인가! 그리고 누가 더 상대방을 억누르고, 괴롭히는가! 또한 누가 상대방의 인생과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더럽히는가! 이러한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볼 때마다 누구나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p.142)

그럼 그래야지.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p.146)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땐, 한스가 너무 안타까웠네.(물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래서 한스만 바라보았지. 대체 누가 한스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한스를 그렇게 몰아가고, 한스에게 다른 삶은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주입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한스가 가지고 있는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엉뚱(?)하게 만들어놓은 그들이 야속했다네. 그게 대체 뭐하는 것인가? 그런데 자네에게 편지를 쓰다가 '수레바퀴 아래에 깔린 사람은 한스가 아니라 어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네. 정작 자신들이 수레바퀴 아래서 아등바등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한스에게 그렇게밖에 말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일세. 


언젠가는 속에서 벗어난 높은 곳에서 우쭐대며 이들을 내려다보게 되리라는, 건방지면서도 행복에 겨운 예감이었다.(p.24)

아마 치즈가게나 사무실의 수습생으로 일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여태껏 자신이 그토록 경멸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던 바로 그 가련한 여느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귀엽고 영특한 소년 한스의 얼굴이 분노와 고뇌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p.43)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그 말인즉슨, 내가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기 직전이었다는 말이네. 휴직을 통해 간신히 잠시 옆으로 비켜설 수 있었을 뿐이네.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했는가? 뒤돌아 보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네. 학생의 내면을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지. '네가 노력해야지', '네가 잘못한 거야', '버텨야 해', '라고만 말했네. 물론 '뭐가 힘드니?', '왜 그럴까?'등의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그게 과연 진심으로 물어본 것인지? 아니면 그저 겉치레로 말한 것인지 자문해 보면, 얼굴이 붉어질 뿐이네. 왜 아버지는 한스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는가? 왜 단 한 번도 '너 괜찮니?'라고 묻지 않았는가?, 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터놓고 얘기하지 않았는가? 왜 선생들은 노선에서 벗어난 한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는가? 왜 선생들은 한스에게 다른 길을 다정하게 알려주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 질문들은 "왜 나는 그때 그러지 않았는가?'라고 바뀌어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온다네.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비치는 당혹스러운 미소 뒤로 꺼져가는 한 영혼이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과 절망에 싸인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p.172)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한스가 신학교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날, 난 한스가 느낀 감정이 너무 안타까웠다네. 어찌 되었든, 그는 학업에 실패했고 친구도 없었으며 날개가 꺾인 채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도 부족할 텐데, 한스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네. 그런 한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로서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았네. 내 아들은 만약 무엇인가 실패를 하였을 때, 자신의 감정에 대한 것을 먼저 생각할까? 아니면 나의 실망이나 나의 화, 분노를 생각하며 눈치를 볼까? 이에 대한 대답을 당당하게 할 수 없는 나를 발견한다네. 한없이 자상하다가도 아이의 실수에 무자비하게 반응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네. 입으로는 '괜찮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라고 말을 하면서, 정작 아이의 실수에는 무척 엄격하게 대했었네. 나 이대목을 읽으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네. 


여러 가지 육아서를 보면서 '아이의 실수에 관대해져라', '아이의 행동을 봐라', '아이와 눈을 맞춰라', '아이의 메시지를 잘 읽어라'등 좋은 글들을 많이 보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네. 아니 옮기려고 해 봤지만, 길게 가지는 못했네. 머리로는 이해가 되었지만, 가슴으로 와닿지는 않았기 때문일세. 그런데 자네의 이 책은 그걸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었네. 아이의 말뿐만 아니라 아이의 행동, 아이의 눈빛 이 모두가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그것을 눈여겨보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극도의 두려움이 소년의 얼굴에 스며 있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p.43)

하지만 한스가 그것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스의 마음은 실망스럽게도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렸다는 죄책감 때문에 우울하고 어두워졌다.(p.176)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나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아니 따지고 싶은 게 하나 있네. "꼭 한스가 죽어야 했는가?"일세.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조마조마했다네. 한스가 어떻게 될까? 한스가 자신의 날개를 펼 수 있을까? 그것을 진심으로 바랬다네. 그런데 한스가 강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다네. 독서토론 모임에서 이 책을 가지고 토론할 때면 그의 죽음이 자살인가? 아니면 실족사인가? 하는 의문이 꼭 나온다는 것을 자네는 아는가? 물론 소설일 뿐이고, 어떻게 보면 이것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결말이겠거니 생각한다네. 자네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한스의 죽음은 자네의 어린 시절과의 이별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전진하겠다는 자네의 선언이라고 나는 여겨진다네. 그럼에도 난 따지고 싶다네 "자네, 꼭 한스를 죽여야만 했는가? 한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줄 순 없었는가?"말일세.  


같은 시각,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그토록 꾸짖던 한스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검푸른 강물을 따라 골짜기 아래고 조용히 떠내려가고 있었다.(p.260)

수레바퀴 아래서(헤르만 헤세, 민음사)


책을 곱씹을수록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지 않기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라는 생각이 더 강해 지네. 40이 넘어 만난 이 책은 아버지로서,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묵직하게 던져주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한번 찾아보려고 하네. 자네의 책은 나에게 채찍이자 구원이 되었다네. 나의 잘못을 일깨워주고, 그런 나를 혼내주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려주었네. 수레바퀴 아래서 허둥대는 어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네. 잘 지켜봐 주시게. 나에게 좋은 선물을 주어서 고맙네. 


2021년 8월 1일(일) 

헤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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