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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세처럼 Apr 27. 2022

[6-4] 어느 4개월의 기록

아티스트웨이 마이웨이 2기.

자는 둥 마는 둥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는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9시가 되어서 책상에 앉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고,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이 살짝 떨린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합격자 조회 버튼을 누르고,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른다.

"없는 수험번호입니다."라고 메시지가 뜬다.

'어! 뭐지?' 하나하나 확인해가면서 다시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른다.

"없는 수험번호입니다."

여러 번을 확인해가면서 계속 시도해봐도 같은 메시지만 계속 뜬다. '헉, 왜 이래? 뭐가 문제야?' 없는 수험번호라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수험표를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실소를 터트린다.  

"이런 바보, 다른 학교 수험표잖아."라고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는 서랍을 열고 제대로 된 수험표를 찾는다. 아무리 긴장을 해도 그렇지, 다른 학교의 수험표를 입력하면서 잔뜩 쫄았던 자신을 생각하며 헛웃음을 짓던 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어쩌면 아까의 실수가 더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애써 지워버린다. 하나하나 수험표를 입력하고 숨을 크게 들이켠다.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손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며 스트레칭을 한다. 차마 엔터키를 누르지 못한다. 수십 초가 지나고 눈 딱 감고 엔터키를 누른다.

"축하드립니다. 합격하셨습니다."라는 팝업창이 뜬다.

그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는다. 그의 어깨가 살짝살짝 떨린다. 손으로 눈을 한 번 쑥 닦고는 화면을 다시 쳐다본다.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보인다. 전화기를 들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엄마, 저 합격했어요."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꽃잎이 휘날린다.


 4개월 전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겨 있다. 자신이 선생님이 되어서 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얘기를 해주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깨달은 그는 속으로 소리를 지른다.

'야이 등신아, 왜 또 그 생각을 해, 선생님이란 꿈은 포기했잖아. 진작에 포기했잖아. 지금 그걸 상상하는 건 무슨 지랄이야, 지금은 방법도 없잖아.'라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책망한다. 그렇게 계속 스스로에게 욕을 하다 지친 그는 이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선생님이란 꿈을 포기했었지?

-고등학교 1학년 때

-왜 포기했었지?

-말을 더듬어서, 글씨를 못 써서.

-맞아, 그땐 말을 너무 심하게 더듬고, 글씨를 너무 못 써서 포기했었지. 근데 지금은?

-지금? 지금은 말도 안 더듬고, 글씨도 못 쓰진 않아. 사람들이 알아볼 순 있어.

-그럼 선생님을 포기했던 이유가 사라진 거잖아. 선생님 하고 싶지 않아?

-선생님 하고야 싶지. 근데 너무 늦지 않았을까?

-그러게 왜 지금 이런 상상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 어떻게 하라고?

-그러게 말이야,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이제 와서 어쩌라고

-진지하게 묻는데, 뭘 하고 싶어? 뭘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건 모르겠는데 선생님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아니 선생님을 해야 행복할 것 같아.

-선생님을 포기했던 이유도 사라졌고, 선생님에 대한 미련도 남아있고, 선생님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으니 다시 도전해 보는 건 어떨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안 그럼 오늘을 후회하면서 살 것 같아.

-그래, 선생님에 다시 도전해보자.

추석 연휴 내내 혼자 고민을 하며 자문자답을 하던 그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결정을 말하기 시작한다.

"그래 잘했어, 넌 그게 어울려"

"잘했다, 선생님이 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었어. 넌 그리로 가야 해"

모든 친구가 다 그렇게 말해준다. 친구들의 응원이 그의 결심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학교로 돌아온 그는 이제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선택지를 꺼내 본다.

1. 수능을 다시 봐서 사범대에 입학한다.

2. 편입을 한다.

3. 교육대학원에 들어간다.

 수능을 검색해본다. 수능 접수 시간이 9월 초에 끝났다. 올해 수능을 볼 수 없다. 수능을 보려면 1년을 공부해서 다음 해에 봐야 한다. 지금 26인데, 27살에 수능을 보면 28살에 1학년 시작. 음 너무 늦다. 이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을 때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다음 선택지로 넘어간다.

편입, 이건 고려해볼 가치가 없다. 아니지 고려해볼 자격이 없다. 사범대로의 편입이라니, 이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대학 4년의 성적은 처참하다. 그의 성적은 꿈을 잃은 자의 상실이 숨어있다.  

이제 남은 건 교육대학원. 교육대학원은 사립대학교와 국공립대학교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사립대학교는 학부 때 교육학 과목을 6학점 이상 들었어야 지원 가능하다. 교육학 과목을 듣는 친구들을 애써 외면하며(꿈을 포기했기에 일부러 멀리했었던 그이다.) 듣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후회가 된다. 원서조차 쓰지 못한다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공립대 교육대학원뿐이다. 공립대는 교육학을 이수하지 않았어도 되지만, 관련학과의 전공과목 학점만 일정 이상 이수했으면 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전공시험, 교육학 시험,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여러 대학교의 입시요강을 보면서 원서를 접수했다. 일정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다 보니 3개의 학교가 남았다. 가장 빠른 것은 2달 후  시험이고 늦어도 3달 안에 시험이 다 끝난다. 2~3달 안에 전공과목을 다 공부해야 한다. 10년 전에 포기했던 꿈, 그 꿈을 다시 꾸는 것은 자유였지만 그 꿈을 손에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서를 접수한 날부터 바로 수험생 모드로 변신했다. 매일 게으르고, 늦게까지 게임하고, 늦잠 자던 그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기숙사 방을 같이 쓰던 동생이 "형,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바뀔 수 있는 거예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6시에 일어나서 2시간 동안 공부하다가, 세수하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또 공부하다가 9시에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기 전에 도서관 앞에 서서 문 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가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도 이렇게 간절했겠지.' 그는 수업 시간, 점심시간, 저녁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2, 3학년 때 배운 전공과목들이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을 이제야 이해하고 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통째로 외웠다.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2 달이라는 기간에 3년의 수업내용을 마스터해야 했다.


1개월 2주 전.

첫 번째 대학교에선 반타작했다. 나름으로 열심히 풀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2 달이라는 시간은 소화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영어시험까지 있어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응시한 것은 분위기를 보고 싶었고,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시험을 보고 온 그날도 공부에 매진했다.


3주 전.

두 번째 대학교에서 시험을 보고서는 그는 눈물을 흘렸다. 교수님들과 면접을 하면서(오전에 시험, 오후에 면접을 동시에 봤다.) "제가 너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왜냐면 전공과목에서 단 한 문제밖에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고,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꿈이 멀어져 가는 것만 같았다.


2주 전.

세 번째 대학교는 바로 그다음 주에 봤다. 금요일 고속버스를 타고 대학교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가장 부족한 과목 책 한 권만 들고 내려갔다. 그리고 모텔에서 잠들기 전에 책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그는 문득 한 정리가 눈에 띄었다. 왜 그 문제가 눈에 띄었는지는 모른다. 왠지 중요한 내용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무작정 외우기 시작했다. "Ker{f} 어쩌고 저쩌고" 정리와 증명을 통째로 외웠다. 불을 끄고 자려고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 다시 한번 노트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제대로 외운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제대로 외웠나 또 적기 시작한다. 그도 그런 자신이 의아하지만, 열심히 외웠다.


시험장에 다가갈수록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이번마저 실패하면 재수를 해서 수능을 다시 봐야 한다. 그걸 다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하는데. 시험장에 앉아서 시험지를 받아 든다. 시험문제를 훑어보다가 깜짝 놀란다. 어젯밤에 통째로 외웠던, 그냥 중요해 보인다고 느꼈던 그것이 그대로 나온 것이다. 다른 문제들도 얼핏 보니 풀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문제부터 풀기 시작한다. 출발이 좋다. 다 풀고 나서 자신 있는 문제부터 풀기 시작한다. 이제 2문제 남았다. 한 문제는 얼추 풀릴 것 같은데, 다른 문제는 좀 어렵다. 풀 수 있는 것부터 풀기로 하고 도전을 한다. 가정에서 출발해서 결론까지 다 알겠는데, 중간에 한 가지 고리가 어색하다.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논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그걸 숨겨서 가정과 결론을 연결 지어 버린다. 무심결에 보면 완벽한 답안처럼 보인다. 교수님을 속일 수는 없겠지만, 그 부분만 부족해서 감점당할 뿐, 나머지는 괜찮다고 자위하며 넘어간다. 마지막 문제를 풀기 시작한다. 어렵다. 머리를 굴린다. 어렵다. 안 되는데, 어떡하지? 심호흡하고 다시 도전한다. 풀리지 않는다. 종이 쳤다. 결국 풀지 못하고 답안지를 제출했다.


그가 시험이 끝나고 복도에 서 있는데 두 응시생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야, 이번 시험 너무 쉽지 않았냐?"

"그러게 너무 쉬워서 깜짝 놀랐어."

"아마 한 문제라도 틀리면 떨어질 거야"

"그러니깐, 다 못 풀었으면, 면접 포기하고 가야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 태연한 척 하지만 그는 속으로 한숨을 짓는다.


면접이 시작되었다. 다섯 명의 교수님이 계시고, 다섯 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들어가는 5대 5 면접이었는데 대략 형식적인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성적이 아닐까 싶다. 교수님 한 분이 웃으면서 "오늘 시험 어땠나요?"라고 물으신다. 가장 오른쪽에 앉은 남학생이(그는 가장 왼쪽에 앉아 있었다.) "문제가 다소 쉬웠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풀었고, 다 맞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내년에 교수님들을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당당한 소리를 들으며 그는 위축된다. 아까 복도에서 들었던 목소리와 오버랩되며, 마치 자기는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차례가 왔다. "재미난 문제들이었고, 제 지금 실력에 맞게 열심히 풀었습니다."라며 소신 있게 말했다. 교수님들의 여러 전공 질문에 당당히 대답하며 면접을 마쳤다.  

   

1일 전.

드디어 내일이 세 번째 대학교의 발표날이다. 첫 번째 대학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합격 조회를 해봤지만, 역시나였다. 될 리가 없었다는 것을 알지만, 불합격 소식은 기운을 떨어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번째 학교는 조회조차 하지 않았다. 솔직히 거긴 조회할 자격도 없다. 거길 조회하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비 오는 날 물 주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세 번째 대학이다. 무슨 신기를 받았는지 시험 전날 외웠던 그 문제가 왠지 합격을 보장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한 문제라도 못 풀었으면 불합격이야'라고 말하던 응시생의 목소리는 불합격을 예언하는 것 같았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잠들었다. 많이 잔 것 같은데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다가 날이 밝았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꿈.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선생님이 된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며 다시 찾은 바로 그 꿈. 3달간의 숨 막히는 노력 끝에 꿈을 향한 첫발을 그는 내디딜 수 있었다. 수능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되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교육대학원 수업과 논문과 임용고시라는 관문이 남아있지만, 그는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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