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세처럼 Apr 30. 2022

[7-4] 희망을 버리러 간다

아티스트 웨이 마이 웨이 2기

"야 어디야?"

"......."

"지금 어디냐고?"

"......."

"왜 대답이 없어.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해?"

"......."

"야!, 너 진짜."

툭.


전화를 끊고, 전원 버튼을 길게 누른다. 핸드폰 로그 화면이 잠시 떴다가 사라진다. 꺼진 핸드폰을 가방에 던지듯이 넣는다. 매표소로 가서 정동진행 기차표를 끊는다. 기차의 출발 시간은 9시 37분. 아직 50분이 남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이 꽤 많다. 꼭 껴안고 활짝 웃고 있는 커플들, 동그랗게 모여 서서 발 밑에 가방을 둔 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 의자에 기대앉아 졸고 있는 사람들, 티비를 멍하니 보고 있는 사람들. 이 시간에 다들 어디를 향해 가려고 하는 걸까? 희망을 채우기 위해 가는 것일까? 아님 나처럼 희망을 버리기 위해 가는 것일까?


대합실을 서성이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너의 모습이 떠오른다. 긴 생머리가 매력적이었던 네가 떠오른다. 웃을 대면 하회탈처럼 눈이 사라지는 예쁜 웃음을 가진 네가 눈앞에 나타난다. 촉촉하고 앙증맞은 입술로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눈물을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며 흔들리던 눈동자,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던 네가 떠오른다. 어느 날 갑자기 단발머리로 나타나서 어색한 웃음을 짓던 너, 다른 사람의 팔짱을 끼고 환한 웃음을 짓던 너가 떠오른다. 발걸음을 멈춘다.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울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하지만 기어이 한 방울의 눈물이 눈꺼풀을 비집고 나온다.   


우리의 과거와 상관없이,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우리가 1년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는 날. 그 자리의 주인공은 우리였다. 아니 너와 나였지. 그런 만큼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라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고, 집을 나설 땐 거기로 가려고 했었다. 근데 난 지금 그곳이 아닌 여기에 와 있다. 네가 나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참을 수 있었다. 너의 차가운 눈빛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너의 웃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웃는 그 웃음은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난 발길을 돌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여기에 있었다.


1년 동안 너와 나 사이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처음엔 친구였고, 마음이 맞는 동료였고, 그리고 한 배를 탄 동지였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이상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게 양날의 검이 될 거라곤 생각 못했다.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난 좋았다. 내가 너에게 위로가 된다는 너의 말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언제나 너에게 힘이 되어주길 원했다.  내가 너를 힘들게 한다고 너가 처음 말했던 그날 난 억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너를 힘들게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에 내가 포함된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너와 친구였던 그때가 그립다. 우리 그냥 이전처럼 친구로 지내자라고 너는 말하지만, 이미 너와 연인의 달콤함을 맛본 내겐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이전처럼 돌아가지 못하면 남남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건 싫지만, 이전처럼 이 불가능하다는 걸 이미 우린, 아니 너와 나는 알고 있다. 남남이라는 그 사실이 내일이 아닌 오늘로 하루 빨라졌을 뿐인 거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고. 그냥 오늘도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일 뿐인 거다.


프로젝트 발표회는 잘 끝냈을까? 내일 돌아가면 너는 어떤 모습을 지을까? 최소한의 책임감 있는 모습마저 저버린 내게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화를 낼까? 아니면 없는 사람 취급을 할까? 아마 너는 그냥 웃으며 인사를 할 것 같다. 무의미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그냥 의미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다. 너에게 의미 없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심장이 아프다. 순간 여기에 있는 나 자신이 싫어진다. 왜 그랬을까? 후회가 된다. 우리가 이전처럼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도 몇 시간 전으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너와 함께 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너를 생각하는 시간도 빨리 흐른다. 어느새 기차를 탈 시간이다. 플랫폼에 나가 기차를 기다리다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켠다. 켜지자 마자 계속 진동이 울린다. 부재중 전화 25통. 너의 이름이 계속 찍혀있다. 기차가 들어온다. 또 전화벨이 울린다. 너의 이름이 뜬다. 기차가 멈춘다. 문이 열린다. 전화벨이 멈춘다. 기차에 오른다. 메시지가 온다. 자리에 앉는다. 메시지를 확인한다.

 [마지막 기회다. 지금 당장 연락 안 하면, 안 돌아오면 다신 너 안 본다] 멈칫한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리려다가 도로 앉는다. 다시 핸드폰의 전원을 끈다. 눈을 감는다. 희망을 버리러 간다. 너에 대한 마음을 버리러 간다. 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글 설명 : 사진 보고 소설 쓰기. 기차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막 써봤다. 쓰고 나니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장르가 이상한, 내용은 요상한 글이 나와버렸다.

작가의 이전글 [6-4] 어느 4개월의 기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