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 수습을 위한 의사수급추계위 법제화의 입법과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해야지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이후 내가 속한 정당의 의원실은 실의에 빠졌다. 비상계엄이라는 역대급 정치적 똥볼 과 이어진 탄핵 이후 모든 것이 붕 뜬 상태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2025년 새해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한 달 정도의 멍한 시간을 지나오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 내가 모시는 의원님에게도 해당하는 사항이었으니까. 그리고 일상의 국회는 아무것도 안 한다는 상태라는 것이 납득되는 공간이 아니다.
국회에 있어서 일상으로의 복귀란 상임위원회 활동의 재개였고, 계엄과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엄청난 폭풍이 쓸고 간 이 공백을 무언가로라도 채워야 했다. 당시 야당 의원실들은 계엄 포고령에 '전공의 처단' 문구가 포함되게 된 계기, 복지부장관은 무슨 역할을 했는지 등에 집중했다.
수세에 몰린 여당 입장에서는 이 패배감과 실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아젠다가 필요했다. 탄핵소추안이 이미 가결된 상태이고, 헌재 인용도 유력시되던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다음 대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하나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보건복지위원회 소속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모든 정치적 위기의 출발점이었던, 의정갈등의 해소였다.
첫 번째로 내민 화해의 손길, 의사수급추계기구 법제화
의정갈등 해소를 위한 역할을 의원실에서 해야겠다는 아젠다를 선정하긴 했는데, 사실 쉽지 않은 과제였다. 계엄 포고령에 '처단'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언급된 상황 속에서 의료계와 화해는커녕 기본적인 소통조차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의정갈등 화해를 중재하는 포지션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의료계에 던지는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했고, 내부 논의 끝에 국회 고유의 기능인 입법이 가장 강력한 시그널이 될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당시 보건복지위원회 최대 쟁점입법은 의사인력수급추계기구를 법제화하여 임의로 의대정원을 증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의료법 개정안이었다. 야당 주도로 의사인력수급추계기구를 법제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 다수 발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발의된 법안의 내용들을 보니 어느 법안도 의정갈등의 당사자였던 의사단체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 의원실이 선택한 정치적 공간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의료계 목소리를 최대한 담은 의사수급추계기구 법제화 법안.
당시 의사단체가 요구했던 사항은 의사수급추계위원회 위원 과반 이상을 의사단체의 추천으로 채우는 것과 추계위원회 위원장을 의사단체에서 추천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추계위원회의 독립성을 보장하여 추계위원회의 결정이 최종적인 결정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소 무리한 내용도 있었지만, 일단 의정갈등의 화해를 중재한다는 목표를 세운 이상 의사단체에게 우리 의원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듣고 있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보내야 했다.
법안 발의 이후, 의료계 내부에서는 '기존 나온 안들 중에서는 가장 의사단체의 의견을 많이 반영한 안'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법안에 대한 의사단체의 공식적인 지지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다. 첫술에 배가 부를 리 없었다.
두 번째 화해의 손길,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전공의법 개정안
당시 의사단체의 내부 사정도 복잡했다. 정부여당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던 전공의 대표가 전공의단체뿐만 아니라 의사단체 내부의 여론도 주도하고 있었다. 의대정원 증원 이후 대거 병원을 이탈한 집단도 전공의였고, '처단'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포고령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것이 전공의였던 만큼 의사단체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전공의의 지지가 절실했다.
의사인력수급추계위 법안을 발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와중에 의정갈등 해소의 일환으로 곧 정부가 주관하는 의료사고 안전망 확충을 주제로 하는 공청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여당 내에서도 의정갈등 해소가 중요 아젠다로 부상하는 분위기였다. 의정갈등 중재의 구심점이라는 포지션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청회가 열리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액션을 취해야 했다.
의료계의 기성세대와 의정갈등 해소의 키를 쥔 전공의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형태의 행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과 의료사고 안전망 확충'이라는 주제의 토론회였고, 토론회 날짜를 정부 공청회가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 정도 일찍 잡았다.
급하게 준비하기도 했고, 의료계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시기라 토론회 패널섭외조차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을 저질러놨는데 패널섭외가 제대로 안되면 낭패 중의 낭패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정말 운 좋게도 이 주제에 발 벗고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모 대학병원 교수님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단기간 내에 전공의 대표자를 비롯한 의료계 기성세대까지 아우를 수 있는 토론회 패널 섭외까지 완료할 수 있었다.
토론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목을 끌었고, 우리 의원실이 단독으로 주최한 행사였음에도 당 지도부가 총출동했고, 다른 의원님들도 십 수명 찾아주셨다.
토론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나서는 그 후속조치로 토론회에서 나온 내용을 중심으로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전공의들의 여러 요구사항을 담은 전공의법 개정안을 입안했고, 발의했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의사단체의 공식적인 지지를 이끌어내진 못했다.
그래도, 절반의 성공
당초 목표했던 법안을 통한 드라마틱한 의료계와의 화해를 중재하려고 한 시도는 좋게 말하면 절반의 성공으로, 나쁘게 말하면 실패로 끝났다. 그렇다고 이 모든 과정들이 무의미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의료계와의 화해를 위해 법안들을 입안하는 과정에서의 의료계와 소통 과정 그리고 대외적으로 법안의 아젠다를 키워가는 과정을 통해 보건의료계와의 소통에 가장 적극적인 의원실이라는 평가는 받을 수 있었고, 이는 추후 대선 캠프에서의 의원실의 역할 정립에도 어느 정도는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평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