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관리기금 도입을 위한 암관리법 개정안
입법실무자로 일을 하다 보면, 법안을 바라볼 때 가급적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그 법안이 가능한 조건인지를 먼저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간혹 꼭 통과되었으면 하는 염원이 담긴 입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내게는 그 입법이 바로 암환자를 위한 돈 주머니, 암기금 도입을 위한 입법이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K-건강보험?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부러워하는 제도라는 말, 한 번쯤은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왜 외국에서 부러워할까?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의 특징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세 가지 정도이다. 단일보험자, 보편성, 그리고 공공성.
우리나라는 국민건강보험이라는 공보험이 전 국민에게 균등한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건강보험 체제를 갖추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병원에 갈 때 어느 정도 국가의 비용보조를 받고 있고 이 비용보조를 국가에서 해주고 있기 때문에 의료접근성이 높은 것이다. 쉽게 말해, 국가에서 병원비를 전 국민에게 지원해주고 있기 때문에 병원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다.
우리와는 반대인 미국은 전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보험이 없다. 미국인들은 주로 사보험에 의존하고, 취약계층(고령층, 저소득층 등)이 부분적으로 공보험에 의존하고 있는 구조다. 그래서 미국에는 생각보다 의료보험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지금 찾아보니 전체 인구의 8% 정도가 의료보험이 없단다. 우리나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자랑하던 K-건강보험은 인구고령화라는 현상에 맞물려 노쇠해지고 있다. 인구고령화는 곧 건강보험을 유지하는 건강보험료를 내는 사람보다, 건강보험에 의존하는 인구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수입보다 지출이 늘어나면 언젠가는 적자로 전환되고, 고갈되는 것이 이치다. 국민건강보험 재정 몇 년에 고갈, 몇 년 뒤에 건강보험료 몇 프로 인상 이런 이야기가 최근에 더 많이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연금에 비해서는 아직 재정이 건전한 편이지만, 인구고령화가 가져올 국민건강보험 재정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국가가 국민건강에 지출하는 비용을 줄이도록 압박하는 주요한 원인이다. 그럼 국가는 어떤 식으로 돈을 아끼는가?
생명과 맞바꾼 '절차'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항암제가 있었음에도, 돈이 없어서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1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차은찬 군의 이야기를 아는가? 은찬이는 6살 때부터 백혈병 환자였다. 골수이식, 항암치료를 모두 버텼지만 세 차례에 걸쳐 백혈병은 재발을 했고 의사들은 당시 '기적의 원샷 치료제'라고 불리던 항암신약이 은찬이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라는 진단을 내렸었다.
그런데 이 항암신약은 1회 투약비용이 무려 5억이었다. 문제는 이 항암신약은 식약처 허가는 받은 상태였지만, 건강보험 급여등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환자가 5억이라는 비용을 온전히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은찬이의 부모님은 결국 집까지 팔아 약값을 마련했지만, 은찬이는 끝내 치료를 받지 못하고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항암신약은 21년 3월에 식약처 허가를 받았고, 은찬이가 세상을 떠나고도 두 해가 지난 23년 4월에나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받게 되었다. 항암제나 희귀질환 치료제가 식약처 허가로부터 건강보험 급여 적용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약 317일이다. 길게는 700일, 800일까지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건강보험 급여를 기다리다가 죽어간 것이 과연 은찬이 뿐일까?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생명과 직결된 약인데, 허가까지 됐는데 왜 건강보험 급여 적용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까?
항암제의 경우, 건강보험 급여 적용까지 가려면 여러 관문을 지나야 한다. 식약처 허가를 통과하고 나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서 암질환심의위원회(암질심)에서 임상적 유용성을 인정받아야 하고, 약제급여평가위원회(약평위)에서 급여적정성을 평가받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사와 약가 협상까지 마무리해야 급여 적용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절차에 다소간 변화가 생겼다. 임상적 유용성, 즉 해당 약제가 실제로 임상적으로 효과가 있는지를 평가해야 하는 암질심 평가항목에 '재정영향'이 평가 항목으로 추가된 것이다. 재정영향은 경제성평가라는 다른 이름으로 약평위에서 다시 한번 심사를 거치게 된다. 항암제 하나가 건강보험에 급여 등재되기 위해 재정적 평가가 두 차례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적 변화가 일어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언급한 인구고령화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고갈에 대한 우려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는 관료제의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라고도 보여지지만, 그 사이에서 꺼져가는 생명은 그저 방치되어야만 하는가?
317일을 위한 징검다리 입법, 암기금 도입
제도적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21대 국회에서는 어쩌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이 317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비급여 항암제에 대한 재정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암관리기금 신설을 위한 암관리법이 발의된 바 있다.
다만, 기금 신설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먼저, 기금 신설을 위해서는 기금을 충당하는 재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기금 신설을 위해 세금 항목을 신설하는 방안도 있고, 타 기금의 수익금을 일부 차용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그중 가장 강력한 게이트키퍼는 나라의 곳간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이다. 기재부의 동의가 없이는 기금이 신설될 수 없기 때문이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암관리기금 신설을 위한 암관리법 개정안은 제대로 된 논의조차 거치치 못한 채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매우 어려운 과정이지만, 생명과 직결된 길인 만큼 누구라도 이 입법은 꼭 통과시키는 데 앞장을 섰으면 좋겠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해 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본령이 아니겠는가?
암관리기금 신설을 위한 법안은 22대 국회에서도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논의의 장에 올라오지 못한 채 지금도 잠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