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아도 되는 생활입법도 있어요

by Hlee

지금까지의 입법과정들은 주로 정치적 쟁점사안이거나, 큰 재원이 투입되어야 해서 부처 간 이견이 있는 등 소위 말해 '쟁점입법'들의 사례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러나, 입법과정이라고 어떻게 매번 갈등만 있겠는가. 이 장에서는 갈등 없이 처리되었던 생활입법에 대한 짧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소개할 것이다.




장애인 건강검진기관 의무기관 확대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서 각종 질병에 노출될 확률이 높고, 그만큼 기대수명도 짧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장애인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한 개별법인 장애인건강권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법안에 명시된 내용 중에 실질적으로 이행되고 있는 부분은 많지 않다. 이 법에 명시된 장애친화 건강검진기관이 대표적 예시이다.


장애인의 경우, 특히 지체장애인은 보호자 없이는 일반적인 검진기관에 가면 제대로 건강검진을 받지 못한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을 위한 엘리베이터와 경사로가 없는 시설에는 장애인 홀로 출입조차 불가능하고, 출입하더라도 장애인 보조인력이 없으면 제대로 검진을 받기 힘들다. 어떤 장애인 분은 50년 동안 자기 키와 몸무게를 장애친화 검진기관에 가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한 분도 계셨다. 비장애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애친화 검진기관을 지정하는 절차는 있는데 지정받고 난 이후 지급되는 지원금이 너무 적어 장애친화 검진기관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23년 당시만 해도 전체 17개 시도 중 9개 시도에는 장애친화 검진기관이 한 곳도 없었다.


우리 의원실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장애친화 검진기관의 지정 대상을 모든 공공보건의료기관으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장애인건강권법을 발의했고, 이 법은 2023년도 상반기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관당 지원금이 너무 적어 여전히 지정만 되고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못한 곳이 너무 많은 현실이다. 이 분야에 대한 예산 현실화가 시급하다.




마약운전 검사 의무화

작년 10월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출근하고 곧바로 스크랩마스터를 켜서 주요 일간지의 1면 기사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굉장히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약운전으로 인해 면허 취소된 사람들의 수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것 아닌가? 음주운전은 흔히 들어본 개념인데, 마약운전은 생소했다. 근데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술에 취한 거나 마약에 취한 거나 운전하기에 위험한 건 매한가지 아닌가?


아무튼,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 경찰청 관계자의 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음주운전 검사의 경우, 거부할 경우에는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있어서 음주운전에는 불응할 수 없는 반면 마약운전 검사의 경우 불응 시 처벌조항이 없어서 의심이 돼도 검사를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입법공백이다, 법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요 일간지 1면에 실린 기사라 본 게 우리 의원실만 있는 건 아닐 거라, 낼 거면 다른 의원실에서 내기 전에 빨리 내야 했다. 관련 법률인 도로교통법을 살펴보니, 기술적으로 비교적 간단한 문제였다. 기존 음주운전 검사 관련 조항에 '약물'이라는 단어 하나만 추가하면 되는 일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9시 30분쯤 기사를 보고, 점심 전에 초안을 입안하고, 오후에 법제실 약식 검토를 받고 공동발의자를 모집하여 퇴근 전에 발의를 완료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의원실 말고는 딱히 관심이 있는 곳이 없었는지 관련 법안이 나온 것은 없었다.


아무튼, 해당 법안은 실제로 입법공백으로 입법이 필요했던 사안이었어서 별다른 이견 없이 관련 상임위 심사를 거쳐 이듬해 법률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내년부터 마약운전 검사는 의무사항이 된다. 마약운전 하시는 분들은 유의하시길.




재학대 아동 보호 강화

국정감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당시 같이 근무하던 인턴 친구가 아동권리보장원 관련 내용을 살펴보다 관심을 기울일 만한 통계를 하나 내게 가져오며 이거 국감 때 질의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아동 재학대 관련 통계였다.


아동학대를 누가 가장 많이 할 것 같은가? 슬프게도 90% 이상은 가정 내에서 발생한다. 더욱 슬픈 건 아동학대가 1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23년 기준으로 신고된 아동학대 건수만 약 2만 5천 건 정도인데, 이중 약 4천 건은 재학대로 이어진다. 특히, 재학대 4천 중 89%는 가정 내 재학대임에도 열에 여덟 건은 원가정 보호 처분이 내려진다. 즉, 재학대를 당한 그 가정에 그대로 아이를 둔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 의원실 발로 방송사 보도와 아동권리보장원 국정감사 질의로도 이어졌다. 무엇이 문제인가 보았더니, 가장 보호되어야 할 의사표현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의 학대에 대한 현장조사가 부족했다. 어린아이에 대한 학대는 주로 주변의 신고를 통해 적발되는데, 현행법은 이후 학대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지를 조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인해 많은 경우 재학대 조사가 현장방문이 아니라 유선상으로 이루어진다.


2살짜리 아이가 가정 내에서 학대됐는데 우연히 주변에서 발견하여 신고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2살짜리 아이가 자기가 어떻게 학대당했는지 의사표현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최초 학대 적발 이후 학대가 유지되고 있는지 여부를 학대를 했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본다는 것이다.


국감 이후 토론회도 개최했고, 후속조치로 아동복지법 개정안도 마련했다. 법안의 골자는 재학대 사례에 대해서는 현장조사를 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은 국회의 문턱을 넘어 법률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현장의 인력 확충과 이를 위한 예산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문 하나 고친 것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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