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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바람 Jun 21. 2021

2차로 술 깨는 남자


남편과 처음 만났던 날이다. 신규 공무원 임용식 때 내 옆 옆 자리에 있어서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고 마침 남편과 내가 발령받은 곳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저녁에 있던 복지직 동기들과의 술자리 모임에도 함께 갔었다. 스무 명이 좀 안 되는 동기들이 정장을 입은 말끔한 모습으로 술집에 모였다. 가을의 끄트머리에 비까지 내려 약간 쌀쌀한 날, 테이블에 둘러앉은 동기들 사이에는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다수의 맥주파와 소수의 소주파 가운데 남편과 나는 소주파여서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날 술자리가 끝나고 집 방향이 비슷한 몇 사람끼리 같이 걸어가는데 남편이 대뜸 "스타벅스 들렀다 갈까요?" 물었다. 커피나 음료를 마시면서 술을 깨고 가자고 했다.


이게 웬 술맛 떨어지는 소리지.... 살면서 2차로 술 깨러 가자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안 그래도 별로 마시지 않아서 2차를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술이 아닌 음료를 마시러 가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얼결에 다들 스타벅스로 우르르 몰려가 음료 하나씩을 먹는 동안 정말로 술이 홀랑 깨버렸다. 가뜩이나 맨 정신이었는데 더 맨 정신으로 귀가했다. 내게는 다시없을 신선한 기억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었어도 연애하는 동안 같이 술집을 곧잘 다녔기 때문에 과하게 마시진 않아도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 후에 알고 보니 술을 즐기는 스타일 자체가 아니었다. 아마 전에는 퇴근 후에 딱히 할 일도 없고 내가 가자고 하니 같이 마셔준 모양이다. 


집에서 내가 맥주캔을 따거나 소주잔을 꺾을 때 남편은 옆에서 사이다 같은 음료를 마신다. 내가 가끔 "같이 안 마시니까 재미없다"라고 말하면 남편은 "한 명이라도 제정신이어야지" 한다. 누가 들으면 내가 매일 제정신이 아닐 때까지 마시는 줄 알겠다. 술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은 이상한 로망이 있었는데 그래도 나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보다는 덜 마시는 게 좋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비슷한 정도로 마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긴 하지만.)


2차로 술을 깨러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싱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결혼 후에는 그게 큰 장점이 됐다. 원체 약속을 많이 잡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친구나 지인을 만나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술 때문에 골치를 썩을 일이 없다. 먹더라도 알아서 깨고 들어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이번 주 수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에 술 약속이 있는 남편에게 바치는 글)


글과 상관없는 옛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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