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돌도 씹어먹을 것처럼 건강하게 살았으면서 희한하게 헌혈과는 오랫동안 인연이 없었다. 이십 대 때 헌혈차나 헌혈의 집이 보이면 한 번씩 들어가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철분 수치가 부족해서 헌혈을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삼시 세끼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몸도 튼실한데 뭐가 문제인진 알 수 없었지만, 나름 용기 낸 시도가 몇 차례 무산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더 이상 발길을 하지 않게 됐다.
그러다 2년 반 전 지금의 남편과 막 썸을 탈 무렵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길을 걷다 보인 헌혈의 집에 들어갔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누가 먼저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별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헌혈이 가능하다고 해서 마음의 준비 없이 얼결에 피를 뽑았다. 그게 뭐가 그렇게 기쁘던지, 헌혈증서를 받고 혼자 감격했다.
그때 헌혈을 두 차례 한 이후로 임신, 출산, 육아의 산을 넘으면서 한동안 또 헌혈을 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발걸음을 해 오늘 네 번째 헌혈을 했다. 네 번째밖에 안 됐는데 나름 몇 번 해봤다고 이젠 제법 능숙하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레드커넥트 어플로도 예약할 수 있다) 전자문진을 하는 데 얼마 걸리지 않는다. 헌혈의 집에서는 주삿바늘을 꽂기 좋은 팔을 간호사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착한 일을 하게 됐다.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주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은 것 같다. 심적으로도 그렇지만 물질적으로도. 오늘은 헌혈의 집에서 주는 기념품을 넙죽넙죽 받아왔다.
오랫동안 헌혈에 목말라한 덕에 이젠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두자고 작정하게 됐다. 일주일 전에는 목이 조금 아파서 (기침감기약을 먹기도 해서) 혹시나 하고 물어봤더니 가벼운 몸살 정도는 괜찮은데 목이 아프면 염증이 있을 수도 있어서 헌혈을 할 수 없다고 그냥 돌아온 적도 있다. 아주 작은 일로도 헌혈을 못하기도 하니 헌혈을 할 수 있다는 자체로 감사한 마음이 든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를 보면 현재 100회 이상 헌혈에 참여한 사람(명예의 전당에 오른 사람)이 5263명이고, 제일 많이 헌혈을 한 분은 무려 726회나 헌혈을 했다(맙소사).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참 갈 길이 멀고 세상에 인생의 귀감으로 삼을 분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목표는 헌혈을 30회 해서 은장을 받는 것이다(30회, 50회, 100회, 200회, 300회마다 수여하는 헌혈 유공장이 있다). 나처럼 보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동기부여인 것 같다.
헌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하늘이 무척 맑았다. 깨끗한 하늘에 폭신한 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는 동안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구급차 한 대가 옆을 지나갔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도 아픈 누군가는 반드시 있다. 그게 내가 아닐 거란 보장도 없다.
2초에 한 명씩 수혈이 필요한 위급환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넙죽 받아온 기념품.
레드커넥트 어플에서 캡처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