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2일 차 (4월 13일)
론세스바예스 → 수비리 (21.7km)
순례 첫날이 무사히 지났지만 '순례길을 잘 걸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크게 줄어든 건 아니었다. 걱정이 많다 보니 오늘 아침도 일찍 눈이 떠졌다. 침대 끝에 널어놓았던 양말과 모자 등을 침낭 위에 대충 올려 둘둘 만 다음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는 배낭을 들고 살금살금 방 밖으로 나왔다. 부스럭 소리로 다른 순례자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 복도에서 짐을 쌌다. 출발 준비를 하는 몇몇 순례자들의 윤곽이 어둠 속으로 얼핏 보였다.
오늘 도착지로 정한 라라소냐까지는 약 27km 거리다. 첫날부터 무리한 탓에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지만, 다리를 천천히 움직여 몇 발자국 디뎌보니 그럭저럭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낭을 어깨와 골반에 단단히 고정한 뒤 알베르게를 나섰다. 상쾌한 새벽 공기가 남아 있던 졸음을 쫓았다. 스틱을 쥐고 걷는 게 아직 어색했지만 장비를 갖추니 마음이 든든했다. 길을 나선 시각은 6시 반이었다.
길을 걷는 동안 작은 마을을 몇 곳 지났다. 아름다운 마을이었지만 전날 피레네 산맥에서 웅장한 풍경을 질리도록 보아서인지 큰 감흥은 일지 않았다. 오늘도 어제처럼, 느릿느릿 걷는 사이 많은 순례자들이 나를 앞질러 갔다.
새벽에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를 나서며.
몇 시간쯤 걸었을까. 차에 기름이 떨어지듯 갑자기 체력이 소진되는 게 느껴졌다.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어제 싸놨던 바게트를 꺼내 먹고 있으니 때마침 임사장과 신우와 이슬이가 뒤에서 나타났다. 흙바닥에 앉은 채 눅눅해진 바게트 쪼가리로 끼니를 해결하는 나를, 그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길가에 있는 바(bar)를 지날 때,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 세 명을 다시 만났다. 나를 본 임사장이 오렌지 주스나 마시고 가라며 나를 불러 세웠다. 갈 길이 멀어서 쉴 수 없다고 하자 그는 그렇게 열심히 걷지 않아도 산티아고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신우가 어느새 오렌지 주스를 사서 내 앞에 갖다 줬다. 꾸역꾸역 걷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아무튼 그들의 호의는 내게 고마운 일이었다.
일행들과 쉬어간 곳. 바(bar)에서 쉬면 화장실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좋다.
우리는 오렌지 주스 4개를 테이블에 나란히 두고 잠깐 동안 휴식을 즐겼다. 신우와 이슬이와 나는 순례길이 처음인 반면 임사장은 이전에 산티아고에 온 경험이 많았다. 여러 번 걸어본 적 있는 그가 "이렇게 쉬어가도 충분히 산티아고에 도착할 수 있다"라고 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걱정 때문에 잔뜩 긴장했던 몸을 의자에 기대는데, 부드러운 바람 한 줄기가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어? 이곳에 바람이 불고 있었나?'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처음으로 산티아고의 바람을 느꼈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제대로 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전까지의 쉼은 쉼이 아니었다. 목적지까지 걸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마음은 늘 쉬지 못했다. 걱정을 내려놓으니 자연의 색깔과 향기가 한층 다채롭게 다가왔다. 그때 이후로는 줄곧 힘들게 걸으려고만 했던 까미노가 다르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쉬어가면 훨씬 여유롭고 즐거운 길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 졸이며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그날의 목적지에, 아니 최소한 어딘가에는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바(bar)를 나서며 그들은 오늘 수비리에 있는 공립(municipal) 알베르게에서 묵을 예정이라며 괜찮으면 나도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수비리는 라라소냐보다 5km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순례길 풍경.
그렇게 다시 한참을 걸어 수비리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대략 10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 셈이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들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도 라라소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친 다리를 끌고 공립 알베르게로 가보니, 마침 마당에서 자신이 널어놓은 빨래를 흡족하게 바라보는 임사장이 보였다.
수비리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은 다소 열악하지만 가격이 저렴하다.
오스피탈레로(hospitalero, 알베르게 봉사자)가 배정해준 침대 2층 칸에 침낭을 폈다. 배낭에 쓸렸는지 어깨가 조금 아팠다.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떠나오던 날 급하게 산 등산화가 발에 잘 맞았다는 것이다. 길을 들일 시간이 없어서 발이 아플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오래 신은 것처럼 편했다. 요즘은 신발이 잘 나오나보다 하고 감탄했다. 걷다가 발이 부을 걸 예상해 한 치수 큰 걸 산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침대에 침낭을 편 후에는 샤워를 하고 빨래를 했다. 빨래는 비누로 손빨래를 했는데 빨래라고 해봤자 입고 있던 옷과 속옷과 양말이 전부였기 때문에 5분이면 된다. 빨래 자체는 번거롭지 않았지만 땀 냄새가 잘 빠지지 않아 나중에는 세탁기가 있는 알베르게에서 한 번씩 세탁기에 돌려가며 입었다. 그러면 다시 향기 나는 옷을 입을 수 있다.
말끔하게 씻은 우리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근처 바(bar)로 가서 샹그리아와 맥주를 마셨다. 오후 햇빛에 물든 실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확실히 저녁의 까미노는 낮에 빡빡하게 걷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음날 걸을 수 있는 힘을 얻기에 충분하다. 나도 그렇고 다른 순례자들도, 단조로워진 삶에 꽤 만족하고 있는 듯 보였다. 오늘도 하루만큼의 걱정이 줄어들었고, 걱정이 줄어든 자리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만큼의 행복이 스며들었다.
순례길 tip - 물집 방지
1. 오래 걷는 동안 발이 붓기 때문에 신발은 한 치수 큰 걸로 산다.
2. 개인적으로 양말은 발가락 양말을 신은 다음 폭신한 등산 양말을 덧신으면 물집이 잘 생기지 않았다.
3. 쉴 때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쉬게 한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책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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