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하물 분실

by 햇살바람



두 번째 까미노는 첫 번째 까미노를 다녀온 지 일 년이 지난 여름이었다. 그 사이에 시험공부를 일 년 더 했고, 면접까지 합격한 후에 비행기 표를 샀다. 제일 저렴한 한국-파리 왕복 항공권이 90만 원이었다. 2년간의 수험생활과 작년에 순례길을 다녀온 여파로 마지막 생계 수단이던 마이너스 통장까지 바닥을 보이고 있었지만, 산티아고를 가는 일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순례길은 이동 시간을 제외하고 걸을 수 있는 날이 26일뿐이었다. 이번에는 점프 없이 완주를 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799km의 프랑스길을 26일 동안 완주하려면 하루에 30km 이상을 꾸준히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력은 저번 순례길 때보다도 더 부실해진 상태였다.


완주를 할지 점프를 하며 걸을지 결정하지 못한 채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파리에서 바욘으로 가지 않고 마드리드와 팜플로냐를 거쳐 생장으로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까미노는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순례길 tip – 짐 싸기 배낭, 등산화, 슬리퍼, 침낭, 스틱, 여권, 상의 2, 하의 2, 레깅스 3, 바람막이, 평상복, 속옷 3, 양말 3, 발가락 양말 3, 스포츠 타월, 비옷, 모자, 손수건, 로션, 선크림, 세면도구, 바늘.실, 마데카솔, 대일밴드, 면봉, 손톱깎이, 귀이개, 충전기, 이어폰, 지퍼백, 일기장, 펜, 안경, 렌즈, 1000유로.





순례 1~3일 전 (8월 8~10일)
한국 → (파리, 마드리드, 팜플로냐 경유) → 생장


인천공항에서 1시간 늦게 이륙한 에어프랑스가 파리에서 환승을 빠듯하게 하더니, 결국 마드리드에서 일이 터졌다. 수하물 벨트의 모든 짐이 빠져나가고 빈 벨트가 몇 바퀴를 돌도록 내 배낭이 보이지 않았다. 에어프랑스 직원에게 문의하러 가보니 나 외에도 수하물을 분실한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에어프랑스가 수하물 분실로 유명한 항공사라는 걸 그때 알았다. 파리에서 환승 시간이 짧았던 탓에 분실된 수하물이 많은 것 같았다. 짐이 도착하는 대로 숙소로 보내주겠다는 직원의 말에 다들 주소를 적고 떠났다. 하지만 난 정해진 숙소가 없는 데다 배낭에 모든 짐과 돈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꼼짝없이 공항에 혼자 남아 배낭을 기다려야 했다. 직원은 불길하게도 내 짐만 위치 확인이 안 된다며 내일 배낭이 올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보이스톡으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징징거리며 겨우 멘탈을 붙잡았다. 예약해놨던 팜플로냐행 버스와 생장행 버스는 이미 날아가 버렸다. 꼬깃꼬깃하게 접은 수하물 분실 신고서를 손에 꼭 쥔 채, 수하물 벨트 옆 벤치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실됐던 가방들이 속속 도착했지만, 내 배낭은 여전히 위치 확인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이대로 30일 동안 마드리드 공항에 갇혀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별 생각을 다 하다가 일단 배낭 없이 생장으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가지고 있던 작은 보조가방에 여권과 충전기, 체크카드 한 장과 현금 100유로가 들어 있어 아주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마드리드 길을 걸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래도 순례자가 많은 프랑스 길이 안전할 것 같아 생장으로 가기로 했다.


에어프랑스 직원이 나중에라도 배낭을 찾으면 숙소로 보내준다기에 숙소가 일정하지 않으니 배낭을 찾거든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9일 저녁, 마드리드 공항에 묶인 지 20시간 만에, 팜플로냐로 가는 버스를 탔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탓인지 하루 종일 커피 한 잔과 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집에서 쌌던 배낭과 팜플로냐에서 재정비한 배낭.


팜플로냐 쇼핑몰에서 재정비한 물건들 (총 300유로 지출)
배낭, 침낭, 스틱, 판초우의, 바람막이 점퍼, 반바지, 레깅스, 평상복, 속옷, 슬리퍼, 선크림, 로션, 비누, 칫솔, 치약



팜플로냐에 새벽 1시에 도착한 후 생장 가는 아침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번에는 버스 역에서 밤을 새웠다. 이틀 연속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했고, 아침은 더디게 왔다. 버스 역에 있는 카페가 문을 열자마자 크루아상과 커피로 스페인에서 첫 끼를 먹었다. 소박한 식사였지만 그동안의 고생을 잊을 만큼 맛있었다.


버스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쇼핑몰이 있어, 개장 시간부터 버스시간까지 남는 1시간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재정비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정신없이 배낭, 침낭 등의 물건들을 골라 급하게 샀는데, 다행히도 길을 걷는 동안 큰 불편 없이 지냈다. 영수증은 챙겨놨다가 나중에 에어프랑스에서 보상을 받았다(두 달 뒤쯤 약 300유로가 입금됐다. 날려버린 버스 티켓은 보상받지 못했다).


생장에 있는 성당에서 초에 불을 붙이고 있던 순례자.



팜플로냐에서 오전 10시 버스를 타고 생장에 도착한 건 11시 45분이었다. 생장에 들어서는 순간 거짓말처럼 이전까지의 피로가 싹 가셨다. 대신 도시의 넘치는 활기가 그대로 내게 스며들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기엔 늦은 시간이라, 오늘은 하루 종일 생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책 내용 중 일부입니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목차






이전 04화day 2. 오렌지 주스와 바람 한 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