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1일 차 (8월 11일)
생장 → 우로비 (29.7km)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무료 조식으로 빵 한 쪽과 커피 반 잔을 마신 뒤 아침 6시에 길을 나섰다. 두 번째 걷는 길이지만 길을 나서는 설렘은 전혀 줄지 않았다. 줄기는커녕 오히려 한 번 걸었기 때문에 전에 비해 두려움이 줄어든 만큼 설렘이 더 크게 자리했다. 같은 곳을 걸으며 추억을 덧칠하는 기분이 썩 괜찮았다. 기회가 닿으면 몇 번이고 이곳에 다양한 빛깔의 추억을 쌓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출발한 순례길이지만 설렘은 설렘이고 힘든 건 힘든 거였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일은 이번에도 녹록지 않았다. 첫 번째 순례길처럼 이번에도 하루 종일 책상 앞에만 붙어 있다가 갑자기 건너온 여정이라 체력도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무슨 배짱인지 8km 지점에 있는 오리손 산장에서 맥주까지 마시는 바람에 더 빨리 지쳤다. 산티아고 길을 또 걷는다는 기쁨에 너무 취해있었나 보다. 걷는 내내 구토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작년처럼 길옆에 쓰러지듯 누워 낮잠으로 체력을 보충하며 걸었다.
산은 오르막은 완만하고 내리막은 가팔라서,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였지만 산 밑에 당도하는 데는 1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꼬박 12시간 40분을 걸었다. 쓰러지듯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 앞에 당도하니 밖에 나와 있던 오스피탈레로(알베르게 봉사자)가 물을 마시라며 친절하게 식수대의 물을 틀어줬다. 내가 물을 마시며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그 봉사자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뗐다.
"알베르게에 빈 침대가 없다."
내 귀를 의심하며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서 있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필요하다면 다음 마을까지 가는 택시를 불러주겠다고 했다.
택시라니. 첫날부터 점프의 유혹을 받을 줄은 몰랐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곳에 침대가 없다면 다음 마을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마을 우로비까지는 5km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저녁 7시가 가까운 데다 산을 넘느라 너무 피곤하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 택시를 타야 하나? 작은 식당에 앉아 빵과 오렌지 주스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고민하다가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저번 순례 때 완주를 못했던 게 은근한 아쉬움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이번 까미노에서는 그런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을 남김없이 먹은 다음, 편안한 복장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순례자들 틈을 빠져나왔다.
우로비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한 건 저녁 9시였다. 저녁 어스름이 깔려 알베르게 주위는 적막했다. 땀과 흙으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노곤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데, 어쩐지 묘한 행복감이 몰려왔다.
순례 2일 차 (8월 12일)
우로비 → 자발디카 (33.7km)
중간에 길을 벗어나는 바람에 다시 순례길로 돌아오느라 40분을 허비해야 했다. 어두운 새벽에 좌회전으로 꺾인 화살표를 못 보고 지나친 탓이다. 잘못 든 길을 다시 돌아오는 시간은 유난히 길고 지루하다. 그래도 견디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잘못된 길로 계속 가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길옆으로 낯익은 카페가 나타났다. 작년에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가졌던, 산티아고의 바람을 처음 느꼈던 그 카페였다. 시간만 흘렀을 뿐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작년과 똑같은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그때의 바람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먼 풍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년에 같이 걸었던 일행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때의 시간들은 흩어져버렸지만, 추억 속을 걷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오늘 도착지로 정한 주리아인에서, 오늘도 남는 침대가 없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매우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침대가 없다는 말에 망연자실했다. 할 수 없이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운 다음, 3km 떨어진 자발디카를 향해 걸었다.
주위가 어둑해지며 비가 조금씩 떨어졌다. 주섬주섬 판초우의를 꺼내 입는 사이 근처에서 나처럼 판초우의를 꺼내 입는 독일인 순례자와 마주쳤다. 그는 오늘 팜플로냐까지 갈 거라고 했다. 팜플로냐는 앞으로 10km 이상을 더 걸어야 나오는 곳인데.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큰 배낭을 메고 성큼성큼 빗속으로 사라졌다.
자발디카의 알베르게.
자발디카의 빠로끼알(paroquial)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하는 수도원 알베르게였다. 비에 젖은 나무 사이로, 폐가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미녀와 야수의 비밀스러운 성에 들어가듯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기도하는 심정으로 침대가 있는지 물었다. 오스피탈레로는 웃으며 있다고 했다.
순례길 tip - 기부제 알베르게
알베르게 가운데 기부제로 운영되는 곳들이 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기부제 공립 알베르게는 보통 잠잘 곳만 제공하는 반면 수도원 알베르게는 저녁과 조식 등 식사까지 제공해주는 곳이 많았다. 기부제 알베르게에서는 기부(donativo)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된다. 형편상 돈을 내지 못하는 순례자를 배려하기 위해 모든 순례자들이 일부러 아무도 없을 때 돈을 넣는다고 한다(실제로 누군가 돈을 넣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정상 도나티보 알베르게에서 신세를 졌던 순례자들 중에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찾아와 숙박비에 사례비까지 얹어서 내고 가는 이들도 더러 있다고 한다.
도나티보 알베르게에 묵을 때는 마련된 상자에 돈을 넣으면 된다.
순례 3일 차 (8월 13일)
자발디카 → 오바노스 (30km)
팜플로냐를 지나 용서의 언덕을 넘었다. 원래는 팜플로냐 쇼핑몰에 다시 가서 필요한 몇 가지를 더 살 계획이었지만, 팜플로냐를 지나는 동안 마음이 바뀌어서 그냥 지나쳤다. 순례길을 벗어나 다른 곳을 간다는 건 웬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꼭 사야지 생각했던 것들이지만 며칠 지내는 사이 그럭저럭 익숙해지기도 했다. 한 켤레씩밖에 없는 발가락 양말과 등산 양말은 매일 빨아서 버티고 있었고, 수건은 갖고 있던 손수건을 대신 사용하니 지낼 만했다.
매일 30km씩 걸은 지 3일이 지났다. 저녁에는 고기가 들어간 메뉴로 든든하게 밥을 먹었다.
용서의 언덕을 넘기 전. 바닥에 누워서 쉬고 있는 자전거 순례자들.
순례 4일 차 (8월 14일)
오바노스 → 로스 아르코스 (46.3km)
작년 봄에 걸었던 산티아고는 아름다운 유채꽃밭의 향연이었다면, 가을 문턱의 이 길은 달콤한 열매가 후각과 미각을 자극했다. 길가에 열린 라즈베리를 따먹기도 하고, 포도 같은 경우는 포도밭 주인이 순례자들을 위해 길가에 몇 송이 남겨 둔 것을 따먹을 수 있었다. 지친 길에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다.
원래는 로스 아르코스 전 마을인 비야마요르 데 몬하르딘에서 묵을 계획이었지만, 이번에도 마을에 있는 숙소 두 곳 모두 순례자들로 가득 차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마을 하나를 더 가야 했다. 침대가 없는 상황이야 이제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이전에는 다음 마을이 5km 내 거리로 비교적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다음 마을까지 장장 12.4km를 더 걸어야 했다. 시간은 이미 저녁 7시 반이었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뉘엿뉘엿 떨어지던 해는 결국 자취를 감추고 달빛이 깜깜한 길 위를 비췄다. 새벽에 달을 보며 걸은 적은 많아도 밤에 길을 걷는 동안 달을 보기는 처음이다.
‘이러다 길 위에 침낭을 펴야 되는 건 아니겠지…….’
노숙을 하게 될까 봐 초조해져 내달리듯 걸었다. 어떻게든 알베르게 문이 닫히기 전에 도착해야 했다(보통 밤 10시쯤이면 알베르게 문이 닫힌다). 중간에 물 한 모금 마실 때 외에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더는 못 걸을 것처럼 아프던 다리와 발도 그때쯤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상태였다.
‘로스 아르코스의 알베르게에도 남는 침대가 없으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책 없이 걷고 또 걸어 알베르게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되기 10분 전이었다. 다행히 침대는 있었다. 흙먼지가 잔뜩 묻은 배낭을 침대 옆에 털썩 내려놓고, 나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방은 어두웠고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잠들어 있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발과 다리에 통증이 몰려왔다. 발은 스머프 발처럼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마을에는 무슨 축제가 있는지 밤 11시쯤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순례자들이 괴로워하며 뒤척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책 내용 중 일부입니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