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5일 차 (8월 15일)
로스 아르코스 → 비아나 (18.8km)
8시가 지나서야 눈이 떠졌다. 전날 샤워도 못하고 빨래도 못한 탓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더 늦기 전에 걸어야 할 것 같아 일단 밖으로 나왔다.
오늘따라 눈치 없이 땡볕이 기승을 부렸다. 숨이 턱턱 막히고 옷에서는 쉰내가 났다. 그늘에 앉아 쉴 때면 힘겨움은 금세 잊혔지만, 쉰내와 눅눅한 느낌은 갈수록 견디기 힘들었다.
자발디카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빌&존 쌍둥이 형제를 오전에 우연히 다시 만났다. 느릿느릿 걷는 나를 추월해 가던 그들이 나를 알아보곤 가던 길을 돌아와 말을 건넸다.
"아그네스? (거기선 세례명 아녜스agnes로 나를 소개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버스라도 탄 거야?"
거북이처럼 걷는 내가 자기들과 비슷한 거리를 걷는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알베르게에 침대가 없어서 며칠 동안 엄청 긴 거리를 걷고 있노라고 말해줬다. 그들은 똑같은 얼굴만큼 똑같은 표정으로 놀라더니, 응원의 말을 건네고는 굵직한 다리로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비아나에 거의 도착할 때쯤엔 토니라는 스페인 순례자가 내게 아는 척을 했다.
“너 어제 몬하르딘 지나갔었지?”
“응. 어떻게 알았지?”
“네가 오스피탈레로에게 침대가 있냐고 물어볼 때, 주방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거든. 그때 너를 봤지.”
어제저녁 숙소를 잡지 못하고 다음 마을로 떠나는 나를 봤다고 했다.
"너무 늦게까지 걷지 않는 게 좋아. 게다가 오늘은 날도 무척 덥고 힘드니까. 웬만하면 일찍 숙소를 잡도록 해."
나는 그의 조언대로 오후 3시쯤 도착한 비아나에 짐을 풀었다. 먼지와 땀에 찌든 옷을 빨고, 발에 작게 잡힌 물집을 손톱깎이로 터트렸다. 어제 못 쓴 일기도 썼다.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이다. 나른함이 몰려왔다.
'이게 까미노의 행복인데!'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내며 또다시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서 완주하는 것도 좋지만 점프하며 걷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 아닐까?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사서 고생해야 할까? 몇 번씩 마음이 바뀔 뿐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순례 6일 차 (8월 16일)
비아나 → 벤토사 (29.6km)
6시 20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해가 뜨기 전에 많이 걸어놓기 위해 로그로뇨까지 9.8km를 쉬지 않고 걸었다. 걸어서 완주를 할지 결정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결정하기 전이라 아직은 쉬엄쉬엄 걸을 수가 없었다.
로그로뇨 가는 길. 우측 멀리 로그로뇨가 보인다.
타파스가 유명한 마을 로그로뇨에서, 타파스 거리는 들르지 않았다. 작년에 먹었던 타파스를 기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맛있는 음식도 좋지만, 지금은 더 걷고 싶다고 몸이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길을 찾은 가장 큰 목적은 원 없이 걷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그 외의 것들, 볼거리나 먹거리를 놓치는 일은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오전에 많이 걸어놓은 덕분인지 오후 3시에 벤토사에 도착했다.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알베르게 산 사투르니노(San Saturnino)를 찾아가는데, 약간 넋이 나간 동양인 순례자 한 명이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알베르게 주방에서 세탁실 쪽을 바라본 모습.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했지만 벤토사는 마켓도 식당도 없는 마을이라 끼니를 해결할 일이 막막했다. 주방 수납장을 열어보니 여러 조미료와 함께, 이전에 머물렀던 순례자들이 두고 간 듯한 펜네(파스타의 일종)가 보였다. 종종 순례자들은 필요 없어진 식재료를 (배낭의 무게도 줄일 겸) 다음 순례자들을 위해 남기고 가곤 한다. 그래서 주방이 있는 알베르게에서는 수납장을 한번 휘 둘러보는 것도 재미다. 알베르게 입구 쪽에 자판기가 있어 살펴보고 있는데, 아까 봤던 동양인 순례자가 옆에서 어슬렁거리는 게 보였다. 그도 나처럼 저녁을 해결하기 위한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자판기에서 파스타 소스와 옥수수 캔, 음료수를 뽑아, 주방에 있던 펜네와 함께 대충 섞어 저녁을 때웠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책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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