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에 두 번째 까미노를 다녀온 지 3년이 흘렀다. 뒤늦게 순례기를 쓰면서 아쉬운 점은 그동안 많은 기억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책을 쓰게 될 줄 알았다면 더 많은 기록을 남겨놨을 텐데 그때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짧게 쓴 일기가 전부였다. 그 몇 줄의 일기를 붙들고 글을 썼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반면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글을 쓴 덕분에, 그때는 미처 몰랐던 부분들이 더 잘 보이게 됐다. 까미노가 내게 남긴 것들이 더 잘 보였다.
까미노가 내게 남긴 것을 말하기 전에 ‘까미노 블루’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까미노 블루'는 산티아고를 다녀온 순례자가 그 길을 잊지 못하고 마음이 까미노에 머물러 있는 현상을 말한다. 순례길을 다녀온 많은 순례자들이 까미노 블루에 시달린다. 내가 두 번째 까미노에 올랐던 것도 까미노 블루 때문이었다. 두 번 다녀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금도 "산티아고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아직도 까미노 블루를 앓고 있는 셈이다.
까미노 블루를 앓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산티아고가 특별한 길인 것은 분명하다. 순례길에서 만난 일행 중 프랑스길만 7번째 걷고 있던 누군가는 “산티아고를 다녀 간 다음부터 다른 여행들이 시시해졌다.” 하고 말하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나도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건 아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가 이때까지 했던 다른 여행들과는 결이 다르다. 여행이라기보다 몸의 세포에 기억되는 또 다른 삶(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또 다른 삶의 축소판)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다.
또 그 길에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있다. 각자의 다양한 사연과 치유 받고 싶은 마음을 안고 찾아온 순례길에서, 봉사자들과 순례자들은 상대의 마음을 안다는 듯 서로에게 따뜻한 눈빛을 건넨다. "어떤 사연으로 이곳을 찾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평안하길 빕니다." 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다.
산티아고는 길을 다 걸은 후에 돌아온 일상 속에서 진짜 길이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까미노 블루는, 단순히 그 길을 그리워하는 의미가 아니라, 산티아고 길이 다녀온 이들로 하여금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겪게 되는 가벼운 통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산티아고가 주는 변화는 대체로 눈에 바로 띄지 않고 천천히 드러나지만, 삶을 이전보다 더 긍정적이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길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 경우를 예로 들어 몇 가지를 적어봤다.
행복을 알아차리는 버릇이 생겼다.
힘들게 순례길을 걷던 어느 날, ‘힘든 순간은 이토록 크게 느끼면서, 행복한 순간에는 내가 그것을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행복한 순간에는 그것을 모른 채 당연하게 지나간 날이 많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로 거의 매일 마음속으로 나의 행복을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런 습관이 생긴 후로, 대부분의 날들이 행복하다는 걸 알게 됐다.
미니멀리스트가 되었다.
순례길은 내게 꼭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가지고 살아본 경험이기도 하다. 그렇게 순례길을 걷는 동안 나는 물건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느꼈고, 그 자유로움을 사랑하게 됐다. 미니멀리스트는 결국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곁에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당연한 듯 이어지던 하루가 갑자기 사라지는 게 죽음이겠구나.’
산티아고에 도착하던 마지막 날 이런 생각을 했다. 여행이 끝났을 뿐인데 죽음을 떠올린 것은 한편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산티아고 길은 내게 하나의 삶처럼 느껴졌고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죽음을 연상시켰다. 죽음이 가까이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을 감사한 마음으로 살게 했다.
하고 싶은 건 그냥 하게 됐다.
그동안은 무언가를 하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취미로 피아노를 치고 싶어도, ‘그런 건 해서 뭐하게?’ 하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았다. 단순히 그 행위가 주는 즐거움만으로 선뜻 뭔가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걸 하는 데는 사실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 건 해서 뭐하게?’라는 생각이 들면 ‘내가 좋아하니까’ 하고 답하면 그만이다. 그런 시도들은 결국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까미노가 있을 뿐 정답은 없다”는 말이 있다. 까미노가 가져다주는 변화 역시 그 모습과 시기는 모두 다를 것이다. 큰 변화가 바로 보일 수도 있고, 당장 아무 변화가 없는 듯 보일 수도 있다. 금세 꽃이 필 수도 있고, 뿌리를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가 삶을 변화시켜 준다는 데는 예외가 없을 듯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첫 번째 책을 쓰게 된 것도 모두 산티아고 덕분이었다. 그리고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책 내용 중 일부입니다.
<내 마음에 박힌 별, 산티아고> 목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