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성당 동생을 만났다. 출산 전에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6개월 아기, 그 동생은 10개월 된 아기를 유모차에 나란히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이 내게 말했다.
"점점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나는 "응, 그렇지" 대답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도 우리는 아기들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만났고, 자리 잡은 빵집에서도 아기들이 번갈아가며 소리를 지르는 통에 빵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판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예전과 다른 삶을 사는 일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삶이 고되리라는 것도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주위에 엄마가 된 지인들을 보면 애써 밝은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삶에 묻어난 고단함까지 감추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자유롭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 보였다. 이기적인 나는 그래서, 내가 엄마가 될 줄은 몰랐다.
엄마가 된 지 반년 정도 된 지금의 느낌을 말하자면 나 역시 자유롭던 시절이 가끔 생각나긴 하지만, 그리고 육아가 생각보다 체력적으로 훨씬 힘들긴 하지만, 처녀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적은 없다. 엄마가 되면서 겪은 일들이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귀하기 때문이고, 넓어진 경험의 폭을 굳이 다시 좁히고 싶은 마음은 없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제는 온전히 나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기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아기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 양육자의 시간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됐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맞춤식 서비스를 제공하다 보면 종종 '나'는 희미해지곤 했다.
사실 나는 '엄마'가 된 후로 오히려 전보다 더 악착같이 취미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아기가 낮잠 혹은 밤잠에 들어가면, 누워있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지 않는 이상 무거운 몸을 일으켜 해오던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전에는 그토록 아등바등 취미 생활을 하는이유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니까. 그러다 성당 동생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취미 생활은 무의식 중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취미는 또한 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확신한다. '엄마'에게는 취미가 꼭 필요하다고. 취미는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일 뿐 딱히 잘하는것도 아니고 대단한 성과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함으로써 '나'를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취미로 하는 일들은 대충 9가지 정도였다. 그 9가지는 다음과 같다. 미리 말하지만 독특한 취미 같은 건 없다.
1. 성경 필사
하루 중 시간이 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코로나19 이후로 미사를 못 가고 있어서 유일하게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더 챙기는 이유도 있다. 하루에 성경 1쪽을 필사하는데, 그나마도 주말에는 건너뛸 때가 많고, 솔직히 필사를 하면서도 진지하게 묵상에 빠지는 날은 거의 없다. 그래도 그냥 버릇처럼 한다. 그마저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나의 하루를 지탱해주는 습관인 셈이다.
2. 아기 일기 써주기
아기가 태어난 무렵부터 편지 형식으로 아기의 일기를 써주고 있다. 100일까지는 매일 써줬고, 그 후로는 틈틈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써주고 있다. 아기가 기억하지 못할 오늘을 남겨주고 싶었는데 사실 아기를 위한 일인지 나를 위한 일인지 잘 모르겠다. 아기가 나중에 커서 독립할 때쯤 줄 계획이다(시큰둥할 것 같으면 그냥 내가 가지려고 한다).
3. 브런치 글쓰기
적어도 하루 1시간은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확실히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알게 된 후로, 글 쓰는 즐거움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언제 보일지 알 수 없는 글을 혼자서 썼다면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쓸 수 있었을까? 특출난 재능은 없지만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브런치만큼 좋은 글쓰기 창구도 없는 것 같다. 많든 적든 바로바로 오는 피드백도 좋고, 멀리 떨어진 누군가와 글로 연결되는 일도 좋다.
4. 책 읽기
다독가는 아니지만 나름 꾸준히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는 일이 좋다. 몇 문장은 그물로 건져 올리듯 기록해 놓고, 내 삶에 반영해본다.
5. 주식 투자
얼마 전부터 주식을 사는 취미가 생겼다. 존 리의 어느 인터뷰 영상을 보고 나서부터다. "명품을 사지 말고 그 회사의 주식을 사라"던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껏 투자 금액은 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소액이라서 사실 돈을 벌겠다는 목적보다는 투자하고 싶은 기업을 찾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정도다(마음에 드는 기업이 생기면 1~5주씩 산다).
6. 산책하기
날씨가 아주 덥지 않은 이상 하루에 한 번은 산책을 한다. 햇빛을 쬐고 외부 자극을 받는 등 아기를 위해 하는 일이긴 하지만 나도 바깥공기를 쐬면서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산책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기도 하다.
7. 음악 듣기
전에는 주로 동요를 들으며 아기와 놀아주다가 요즘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챙겨 듣는다. 아기를 돌보며 듣는 음악은 노동요의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8. tv 시청
tv 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좋아하는 예능은 챙겨 본다. 요즘은 '나 혼자 산다'랑 '놀면 뭐하니'를 보는데 재밌어서 정신없이 웃다 보면 일주일치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다.
9. 음주
술 마시는 일도 취미가 될 수 있을까? 취미가 뭐냐는 질문에 '술 마시는 것'이라고 답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챙겨하는 일이니까 적당한 음주는 취미가 맞다.
취미 생활을 즐기려면 나만의 시간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다. 난 내 시간을 갖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하고 있었다.
1. 내가 할 집안일 정해놓기
하루에 할 수 있는 집안일을 정해놓고 그 외의 일은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외의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받지 않는다. 내가 정한 집안일은 간단한 방청소, 설거지, 빨래 2번 정도. 먼지가 보이면 가끔 청소기를 돌린다. 젖병 소독은 남편의 일로 분담해 놓았다. 젖병을 씻을 시간이 있어도, 얌체처럼 남편의 몫으로 남겨놓곤 한다. 내가 집안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고 육아를 오롯이 혼자 하지 않는다는 위안이기도 하다.
2. 아기 용품을 사기 위해 검색하는 시간 줄이기
아기 용품은 한번 사려고 이것저것 검색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꼭 필요한 것만 사는 편이고, 어떤 게 필요한지 남편에게 알려주면 남편이 좋은 것을 금방 찾아서 주문해준다. 장난감이나 아기 옷 같은 것들은 당근 마켓을 이용했는데 키워드를 등록해놓고 알림이 올 때만 보기 때문에 지나친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었다.
3. 주말에 3시간 확보하기
주말에 3시간은 카페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며 글도 쓰고 책도 읽는다.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갖는 일은, '좋아해서'라기보다는 '필요해서'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주말에 3시간을 쓰겠다고 동의를 구해놓았음에도 남편이 항상 먼저 선뜻 다녀오라고 해주는 건 아니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어떤 인간관계든 적당한 거리는 필요하듯이 부모 자식 간이라도 예외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부모 자식 간이라면 더더욱 거리두기는 중요할지 모른다. 자식을 부모 자신과 동일시해서 탈이 나는 가족들을 숱하게 봐왔다. 나는 벌써부터 그런 일을 경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소 뻔뻔할지라도 내가 나를 챙길수록 아기와 서로 건강한 관계 속에서 생활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제 막 태어난 아기는 양육자의 도움과 사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아기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에 소홀히 하겠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엄마'는 나의 역할 중 하나일 뿐인데 그 역할에 너무 과몰입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내가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 때 아기에게도 더 많은 사랑을 듬뿍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나로 돌아올 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나는 이제껏 아기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은 나를 금방 지치게 한다. 아기와 보내는 시간은 내가 엄마로서 존재하는 시간일 뿐 어떤 것을 잃거나 버리는 일이 될 수 없다. 나는 '오늘의 행복'을 미루지 않으며 엄마로서 내 몫의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